2012.08.22 01:20

[단편]부활

조회 수 287 추천 수 1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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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이라고? 그래. 마감 어겼다고 사흘째 호텔방에 쳐박혀 있으면 누구라도 그런 거에 걸릴 만하지. 평소에도 대여섯개의 약을 섞어서 먹는 마당에 상태가 좋아질 리도 없었다. 내 담당 편집자, 김팀장이 내 등 뒤에 앉아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차피 할 것은 없었다. 워드만 깔린 노트북에 뭘 더 바라는가. 방 안은 아침에 갓 정리했던 시트의 희미한 냄새, 여름 한 철 청소하지 않고 내버려 둔 탓에 풍기는 에어콘의 시큼한 악취, 그리고 홀아비 특유의 냄새로 가득했다. 문 바깥 손잡이에 걸린 그 종이쪼가리에는 분명히 ‘방해하지 마세요.'라 적혀 있을 것이다.

“장 선생님, 계속 이러시면 저희도 곤란해요. 저희도 하고 싶어서 이 짓 하는거 아닌거 다 아시잖아요.” 놈은 도울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의 핸드폰에서는 쉴새없이 꼬맹이의 코 잔뜩 막힌 목소리가 ‘메시지 왔어요!’ 라고 앵앵거리고 있었다.

“아, 알고말고. 방금도 담배 좀 사다달라고 이야기했더니 무슨 약쟁이라도 보는 것처럼 째려보시고 말이에요.”

“한두번이어야죠. 저번에도 담배 사다 달라고 그런 다음에 도망가셨으면서.” 내 뒤의 침대에 앉아서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고 있는 저 새끼는 정말 밥맛이다. 나이도 나보다 대여섯살은 어린 주제에, 틈만 나면 못 갈궈서 안달이고. 무엇보다 뒤에서 누군가가 내가 작업하는 걸 지켜보고 있으면, 다들 보고 있는 아래서 바지라도 벗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 이 놈은 알까.

“에라이.”

화면의 커서가 깜빡거렸다. 몇 시간째 앉아 있었더니 눈이 뻑뻑하고 손목이 아팠다. 진도가 전혀 나갈 줄을 몰랐던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아침 아홉시부터 쓰기 시작한 글이 새벽 3시까지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동이 틀 무렵에서야, 나는 김팀장에게 검사를 받고 풀려날 수 있었다. 의례적인 인사가 오갔다. 로비를 나서자, 프런트맨이 징하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뻑뻑한 눈과 잔뜩 굳은 어깨로 택시를 잡고 있을 때, 젊은 여자 둘이 내 쪽을 보며 깔깔거리며 지나갔다. 의사에게 이야기했을 때는 ‘단순한 피해망상’이라고 했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딱 한가지였다. 내가 정말로 병신처럼 보여서 여자들이 비웃는 것이다. 아니, 여자들뿐인가? 지나가는 모두가 그랬다. 차를 타고 강변북로를 달릴 때도, 백미러로 이쪽을 쳐다보는 기사도 묘하게 실실 웃는 분위기였다. 그래. 아무도 보지 않는 잡지에 싸구려 글이나 싣고, 그것도 감당하지 못해서 매달 이런 전쟁을 치루고. 나는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역시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아무것도 오지 않았던 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있어봐야 양육비 이야기겠지. 들어가서 반갑게 인사 하려고 그러면 또 술이나 마셨냐고 그러고. 그러고 용돈이라도 주면 고개만 살짝 숙이고는 방으로들 들어가 버리지. 그나마도 집에서 쫓겨나서 이러고 있는 판에는 그것도 할 수 없었고. 다들 나를 비웃고 있었다. 택시 기사에게 거스름돈은 필요 없다며 보낸 뒤, 물에 젖은 걸음으로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구두를 아무렇게나 팽개친 채로, 소파에 누웠다. 눈을 감아도 잠은 전혀 오질 않았다. 결국 나는 커튼을 치고 나서, 땀투성이가 되어 소파를 온통 허옇게 만들고 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날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완벽하게 도망갈 수 있었다. 핸드폰이 끊임없이 울려대는 통에, 전원을 꺼 버렸다. 그리고 길가에서 깡통을 들고 있던 거지에게 지갑에 들어있던 몇 장 안되는 만원을 쥐어주고는, 항상 마감쯤이면 갇혀 있는 호텔로 향했다. 엉망진창이 된 인생을 끝내는 곳으로는 가장 적당하겠지. 오른손에는 근처 주류전문점에서 산 싸구려 보드카가 들려 있었다. 평소라면 절대로 마시지 않을 터무니없는 가격이었지만, 지금 뭐가 아쉬우랴. 프론트맨이 날 아는 척 했지만, 무시했다. 솔직히 기분은 좋았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며 내는 웅웅 소리에, 심장을 누가 끈으로 옭아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캡을 돌려 따고, 평소에 먹는 약과 함께 싸구려 독약을 속에 부어 넣었다. 그리고 카드키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창문을 확인해 봤다. 발코니가 있는 구닥다리 호텔만큼 사고가 나기 쉬운 곳도 없겠지.

나는 발 밑에 펼쳐진 광경을 봤다. 삼십분도 채 지나지 않아 수없이 모인 사람들과 몇 대인가의 소방차. 멍청이들, 사람 죽는 게 뭐 대단한 구경거리라고. 사방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뺨을 금세 식혔다. 핏속을 도는 알콜이 단숨에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소방차에서 확성기 소리로 뭐라고 열심히 떠들어댔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암, 그딴 게 들리려고. 한 발짝. 단 한 발짝만 디디면 된다. 내가 디디고 선 돌 턱은 미끈미끈하니까, 내가 뛰어내리지 않아도 바람이 알아서 해 줄 것이다. 뛰어내리고 나면 마감도, 김 팀장도, 양육비 보내달라고 징징 짜는 여편네도, 이름이 내 허리만큼이나 긴 알약들도 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하고, 허공으로 한 발짝을 디디려는 순간, 머리속에 뭔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허공에 있었다. 바닥이 점점 내게 다가오고, 시야가 시뻘겋게 물들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기껏 인생의 역작이 내게 다가왔는데 내게, 내게-

“정신이 드세요, 선생님? 장 선생님? 이거 몇 갠지 보이세요?” 김팀장의 목소리였다. 그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몹시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려다가, 옆구리에 지독한 통증을 느끼고 다시 주저앉았다. 살아 있었다. 아직 살아 있었다고. 실성한 놈처럼 입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김팀장의 표정으로 보건데, 머리를 다친 거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여기가... 어디에요?” 내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온통 하얀 빛이었는데, 김팀장만 아니었으면 여기가 천국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자살자들의 숲이거나. 확실한 건, 김팀장은 거기에 없을 거란 사실이다.


“아, 그...... 사고때, 다행히 떨어지다가 깃대에 아슬아슬하게 걸리셨거든요.” 김팀장이 말했다. 하지만 귀에는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집에서 완전 난리셨어요. 사모님이랑 따님은 울고 불고 어쩔 줄 모르고......” 새 이야기. 소위 말하는 역작이라고 불릴지도 모르는 놈이 머릿속에서 내보내 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귓가에 입이 걸리는 걸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주변이 온통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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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arsas 2012.08.24 19:55
    욀슨 님 글만의 독특하면서도 음울한 분위기는 참 배우고 싶은 점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뒤로 밀리는 느낌을 준달까요.. 아무튼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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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욀슨 2012.08.27 22:23
    다소 시간에 쫓기는 글이긴 했는데, 그래도 괜찮게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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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주[尹主] 2012.10.19 05:40
    자살 시도 후 찾아온 인생 역전의 찬스라니 ㅎ 평범하지만 흥미로운 소재네요. 게다가 누구나 써먹을 수는 있지만, 야르사스 님 말씀처럼 이렇게 잘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분은 흔치 않을 거에요.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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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건마 포인트맨 2012.10.19 05:40
    10점 뽀오나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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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욀슨 2012.10.19 06:34
    보통 소재를 모아놓은 다음 괜찮다 싶어 뵈는 것들을 집어서 쓰곤 하는데, 요즘에는 책을 게을리 읽어서 그런지 확실히 소재들이 진부한 감이 있지요. 이것도 평범한 소재에, 쓰려고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짧기도 했고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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