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07 01:51

묘비

조회 수 361 추천 수 2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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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완전한 허구입니다. 실존 인물, 단체, 아무튼 기타등등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은 손전등의 작은 빛밖에는 없었다. 어둠만이 갑갑하게 모든 걸 둘러싸고 있었다. 안에는 오래 된 건물의 쿰쿰한 냄새와 지하 특유의 습한 냄새, 정체 모를 시큼한 악취가 감돌았다. 네 명은 자신들이 내려온 에스컬레이터를 비췄다. 계단 하나마다 낀 시꺼먼 때와 녹. 누군가 올라가자마자 당장 움직여서 떨어뜨릴 것 같은 악의가 풍기는 것 같았다. 방금 저걸 밟고 올라왔는데도 그들은 그렇게 느꼈다. 사방에 선반들이 비에 닳은 묘비처럼 서 있었다.

“우린 존나 옛날에 끝났어. 다 돈 때문에 하는 거지.” 부장이 말했다.

“그러니까 O같은 사진이나 찍고 빨리 뜨자, 빌어먹을 새끼야.” 영철이가 말했다. 그리고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한밭 시립대 폐가탐험 동아리(이하 폐동)였다. 물론 폐가탐험 동아리 따위를 학교에서 정식으로 인정해 줄 리는 없었기에, 결국 이건 그들끼리만 부르는 이름에 불과했다. 매번 어디를 탐방하자는 이야기만 하고, 결국 피씨방에서 롤이나 하고 술이나 마시길 1년. 이번 여름 방학이 되어서야 그들은 폐가탐험을 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첫 타자가 이 백화점이었다. 10년 전에 불이 나서 많은 사람이 죽은 곳. 하지만 건설사가 부도가 난데다가 아무도 여길 사들일 생각은 하질 않았기 때문에(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아직까지도 도시의 노른자위 땅에 과거의 유령인 양 서 있었다. 보통 이런 빌딩에는 양아치들이나 노숙자, 범죄자들이 자리 잡게 마련인데, 안은 항상 텅 비어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백화점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돌았으니까.

하지만 무식한 놈이 용감하다고, 폐동 일당은 전설 같은 건 믿지 않았다. 일당은 천천히 선반 사이를 둘러봤다. 지하였고, 역시 여기는 식품 코너였던 모양인지 아이스크림 냉장고도 여기저기 있었다. 하지만 열어보고 싶은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그야 당연한 게, 전기가 끊긴 것은 10년 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냄새도, 음침한 기운도 더해졌다.

“이것 봐, 피클이야. 기념품으로 가져가야지.” 광혁이가 빵빵하게 부푼 깡통을 보고 말했다. 손전등으로 비춰 본 깡통의 유통기한은 이미 15년이 지나 있었다. 그의 옆에서 언제나 말이 없는 용식이가 황도 캔을 집어들었다가, 기겁을 하며 내려놓았다. 국물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여기 쵸코파이도 있어. 먹을 수 있으려나?” 홍일점 영희가 말했다. 상자는 빛이 바래 있었고, ‘정’ 마크도 찍혀 있지 않았다. 각자 전리품을 챙기던 도중, 영희가 비명을 질렀다. 


“왜 그래!”

“저기, 저기 사람이! 사람이 있어!” 영희가 얼굴을 가리고, 저쪽을 가리켰다. 과연, 그 쪽에서 괴기스러운 붉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넷은 숨을 죽이고, 한 걸음씩 그 쪽을 향했다. 보통 정육점이나 선어 코너가 있는 곳이었다. 갑자기 광혁이 비명을 질렀다. 그 쪽을 본 일행은 너나할 것 없이 비명을 질렀다. 정육점 코너의 선반에 잘린 사람의 팔다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시뻘건 빛 아래서 여자의 텅 빈 눈이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비명을 지르며, 모두 제 자리에서 목 놓아 울거나,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뛰어가는 등 다양한 증상을 보였다. 제일 먼저 안정을 찾은 것은 현철이었다. 자세히 보니 팔다리는 마네킹을 따로따로 떼어 놓은 것에 불과했다. 머리 역시 미장원에서 쓰는 이발용 연습 인형일 뿐이었다.

“하하, 이봐. 그냥 마네킹이잖아. 안심해...” 현철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뒤에서 녹슨 쇼핑카트가 굴러왔기 때문이었다. 모두 패닉에 빠진 가운데, 쇼핑카트는 현철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영희를 받은 채로 뒤에 있던 수조를 깼다. 수조에서 시커멓고 질척질척한 무언가가 흘러내려 영희를 삼켜버렸다. 현철은 재빨리 오물을 헤치고 영희를 흔들었다. 하지만 영희는 기분 나쁘게 흔들릴 뿐이었다. 목을 짚어보니 맥박이 뛰질 않았다. 대체 누가?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 왜? 또다시 비명소리가 들렸다. 광혁이였다. 뛰어가던 광혁은 철사 비슷한 것에 걸려 더러운 바닥에 넘어졌다. 그가 벗겨져버린 발목 살갗 때문에 고통스러워 할 틈도 없이, 쇼핑카트 하나가 빠른 속도로 굴러와, 그의 옆에 있었던 선반을 쳤다. 무거운 통조림과 병조림들이 쏟아지며 깨지는 소리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시큼한 악취가 더욱 심해졌다. 광혁의 팔만이 부패한 내용물과 터진 깡통, 깨진 병의 무덤 위로 뻗어 나왔다.

“젠장, 젠장, 젠장!” 현철은 뛰었다. 용식 역시 그를 따라 뛰어갔다. 이제 보니 이곳은 사방팔방에 악의적으로 설치된 와이어, 쇼핑 카트와 넘어지는 선반으로 가득한 함정이었다. 오지 말 걸 그랬어. 오지 말 걸 그랬어. 현철은 계속 속으로 되뇌였다. 그들의 뒤로 선반이 무너지고, 쇼핑 카트가 굴러다니고, 와이어가 끊기며 작은 베어링 같은 것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에스컬레이터까지는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었건만, 그들의 발은 바닥에 붙어버린 것 같았다. 현철은 목 높이의 와이어 하나를 코 앞에서 간신히 발견하며 피했다. 하지만 용식은 그렇게 운이 좋질 못했다. 그의 몸만이 바닥에 풀썩 쓰러지며, 앞으로 죽 미끄러졌다. 바닥에 그의 손전등이 미끄러지며 주위의 수라장을 비췄다. 현철이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지르면서 뛰었다. 왜 하필이면 이딴 곳을 답사 코스로 정해서. 수많은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불빛이 아래로, 위로 어지럽게 춤췄다. 그의 눈앞에 에스컬레이터가 보였다. ‘살았다!’ 그는 첫 번째 단을 박차고 올랐다. 한번에 두 개씩, 세 개씩 오르던 도중, 갑자기 밑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가 열심히 타고 올라가던 에스컬레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현철은 균형을 잃었다. 그리고 뒤로 넘어졌다. 넘어지며 그는 계속 비명을 질렀고, 둔탁한 쿵 소리가 났다. 현철은 바닥에서 발작하듯 사지를 뒤틀었다. 겨우 일어서려는 가운데, 그의 발 밑이 무너져 내렸다.

끝없는 무저갱 위로, 비명만이 울려 퍼졌다. 이윽고 암흑이 비명까지 품어 죽였다. 굶주린 암늑대처럼. 그리고 백화점의 모든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양, 식사를 마친 맹수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다음 희생자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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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yarsas 2012.08.07 19:26
    욀슨 님은 괴기스럽거나 공포 장르를 특히 잘 묘사하시는 군요. 긴장감 있게 잘 보았습니다.
  • profile
    욀슨 2012.08.12 19:50
    감사합니다. 엽편 한계상 너무 짧은 분량에 다 우겨넣지 않았나 생각했는데, 그래도 아주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이군요.
  • profile
    윤주[尹主] 2012.10.19 04:45
    호러 영화 오프닝같아요. 긴장감있네요.
    잘 봤습니다.
  • profile
    욀슨 2012.10.19 06:29
    감사합니다. 막상 써놓고 나니 뒷이야기는 전혀 생각이 나질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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