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그드라실! 6화

by 윤주[尹主] posted Apr 3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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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 반 환경미화일이라 들렀어요. 교사 주변 쓰레기만 좀 줍다가 돌아가는 길이에요."


 무슨 일로 왔냐는 내 물음에 선예는 그렇게 답했다. 그래서 사복을 입고 있었구나. 옷만 바뀌었을 뿐인데 그녀는 왠지 낯설고 신선해 보였다. 허벅지를 겨우 덮는 짧은 반바지가, 길고 펑퍼짐한 흰 블라우스 아랫자락에 대부분 덮여 가려지다시피 한 차림이었다. 그 아래 선예가 받쳐 입은 민소매 티가 거의 비쳐 보일 정도로 얇고 하늘대는 블라우스에 괜스레 두근댔다.


 "공부는 잘 되가요?"

 "그냥 그렇지, 뭐. 수리 성적이 더 나와 주면 좋을 텐데."

 "진짜, 저도요. 저번 학기 수학 때문에 성적 버렸거든요? 그것 때문에 엄마가, 요새 자꾸 학원 다니라고, 다니라고 그렇게 성화신 거 있죠?"

 "다니지그래? 우리도 보면 진짜, 학원 안다니는 애들 찾기가 힘들 정돈데."

 "진짜, 오빠까지 그러시기에요? 자꾸 그럼 저 진짜 오빠 다시 안 볼 거에요?"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풋, 뭐에요. 그게."


 내 과장된 행동에 선예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흠없이 맑고 깨끗하게 울리는 그 웃음소리에 괜스레 나까지도 기분이 좋아졌다.

 한참 웃던 그녀가 손에 든 종이백을 나에게 건넸다.


 "이거, 나중에 오빠 드세요."

 "뭐야?"

 "멜론이요. 어제 아빠가 들고오신 거 조금 가져왔어요."


 큰 락앤락 용기 안에 깍둑 썰어놓은 멜론 조각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방금 냉장고 안에서 꺼내온 것처럼 아직 서늘한 기가 돌았다.


 "당직 선생님 허락 맡고 냉장고 좀 썼어요."

 "근데 나, 이거 받아도 돼?"

 "괜찮아요. 학교 오다가 오빠 생각나서 가져온 거니까."

 "이야, 감동하겠는데? 선예가 내 생각도 해주고 말야."

 "놀리지 마요, 참."


 토라진 양 선예는 고개를 돌렸다. 정말 화가 난 것처럼은 보이지 않지만 일단 용서를 빌어두기로 했다.


 "미안해, 그냥 장난 좀 쳐본 거야."

 "진짜, 가져온 사람 성의 생각하면 그러는 거 아녜요. 안그래도 그거 담아올 때 아빠가 뭐라고 하셨는지 아세요?"

 "뭐라시는데?"

 "남친한테라도 갖다줄 거냐면서, 뭐 섭섭하다느니, 예전엔 우리 딸 나만 좋아서 졸졸 따라다녔다느니...무슨 주책이신지, 참."

 "너 나 모르는 남친 생겼어?"

 "그럴 리가 없잖아요!"


 화를 내는 표정이 왠지 귀엽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릴 때부터 선예는 그랬다. 귀엽고, 상냥하고, 순진한 데가 있다. 부모님끼리 서로 잘 아는 사이셨고, 무엇보다도 우리집 근처 청과물가게가 그녀 부모님께서 운영하시는 곳이었다. 자연스레 우리도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왔다.

 그랬던 선예가 상선중에 입학했다고 했을 땐 솔직히 좀 놀랐다. 지금이야 남녀공학이지만 내가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상선중은 줄곧 남학교였다. 선예가 입학한 해는 우리 중학교가 남학교에서 남녀공학으로 전환된 첫 해였다. 공학이 된다는 건 애초부터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아는 사람이 거기 입학하리라곤 난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학교가 가깝고, 부모끼리도 아는 사이다 보니 자연스레 이것저것 서로에 대해 듣게 된다. 성적은 아슬아슬하게 우리 고등학교에 지원할 수 있는 정도, 자주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지만 아직까지 선예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단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가끔 내게 집에서 가져온 과일 따위를 가져다주는 모습을 보면, 애인 생기면 정말 상대방에게 잘 해줄 것 같은데도 말이다.

 얼굴에 다소 홍조를 띈 선예를 빤히 쳐다보다 보니,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짝사랑하는 애라도 있는 걸까? 평소엔 낯가림같은 거 없어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고백만큼은 그녀라도 역시 쑥쓰러워 해볼 용기가 나지 않는 게 아닐까?


 "...용기는 나중에, 우리 집에 들릴 때 가져다주세요."


 한참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그녀가 입을 떼어 조금 놀랐다. 알았다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다시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와 내게 말했다.


 "그럼 오빠, 공부 열심히 하세요."


 왠지 기쁜 듯, 부끄러운 듯 몸을 돌려 멀어지는 선예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맘이 설렜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에도 자주 만나지만 오늘처럼 선예가 낯설어 보인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어디가 낯설어 보이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왠지 막연하게 나는 선예가, 그녀가 나 모르게 훌쩍 홀로 커 버린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느꼈다. 항상 그랬듯, 언제나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건 나뿐이 아닌가 하는 그런 불안감이었다. 성적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복잡한 감정을 안고 나는 교실로 되돌아갔다. 발걸음은 손에 든 종이백만큼이나 무거워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선예가 건네준, 멜론이 담긴 바로 그 종이백만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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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분량이 예상보다 점점 더 늘어만 갑니다; 대략적인 계획으론 이번 화에서 나왔어야 할 얘기가, 쓰다보니 뒤로 미뤄지네요.
 까짓거 한 4, 50화 써보죠 뭐....창도개편 특집인 셈 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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