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그드라실! 4화

by 윤주[尹主] posted Apr 2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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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는 멸망한다. 그 말을 들은지 이틀이 지났다.

 그 이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별 일 있을건 또 뭐야.

 자칭 여신, 별칭 이그드라실이라는 꼬맹이가 뭐라건 나는 학교를 갔고, 얼마 남지 않은 수능을 대비해 공부를 했다. 내가 매일밤 본관 앞 전나무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사이 학교는 이미 여름방학에 접어든 상태였지만, 매일 아침 등교해야 하는 일정엔 변함이 없었다. 물론 등교 시간이 한두 시간정도 미뤄지고 야간 자율학습이 없어지긴 했지만.

 그 사이 우리의 '여신님'은 뭘 했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뭔가 했다라고 한다면, 기껏해야 우리 사이 호칭을 정돈하고, 내가 확실히 자기 앞에서 존대를 하는지 확인하고, 그러고는 안도해 남의 집 거실과 학교를 오가며 빈둥댈 뿐이었다.

 가끔 생각나면 경고도 했다. 이를테면 아래와 같이.


 "아까도 말했지만, 남은 일자는 3일뿐이야. 그 전에 손을 쓰지 않으면 세상은 멸망한다고."

 "방금 전까지 개콘 보면서 낄낄대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거 같은데요."

 "말에 가시가 있다? 나도 그저 놀고만 있는 건 아니라고."

 "예를 들면요?"

 "체력보충."

 "그거 그냥 놀고 있단 얘기처럼 들리는데요?"

 "아니야!"


 여신이 발끈하면 말이 길어진다. 얼굴까지 붉히며 큰 소리로 재잘재잘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영락없는 어린애란 생각이 든다.


 "이 몸은 여신이란 말야. 세계수 그 자체라고. 내가 나를 좀 더 가꾸고 관리할수록 세계수도 건강해지는 거거든? 세계수가 건강해지면 미드가드오름의 힘도 강해지니까 멸망을 어느 정도 늦출 수 있단 말야."

 "미드가드오름이요?"

 "세계수에 가해지는 모든 종류의 위협, 모든 형태의 폭력을 제압하고 배제하는 거대한 뱀이야. 본래라면 세계의 위협도 이 녀석이 진작에 해결했어야 하는데..."


 제 긴 머리칼 끝을 손가락으로 꼬으며 여신은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일이 잘 풀려가지 않는다는 것일까?


 "토르가 너무 빨리 작동했어."

 "토르?"

 '미드가드오름이 지나치게 흉폭해지는 걸 막는 일종의 안전장치. 그 녀석 때문에 이런 위기 와중에도 미드가드오름은 비실비실대고만 있고...아, 진짜!"


 자기 손으로 휘저은 탓에 여신의 긴 머리칼은 해집어지고 헝클어져 엉망이 되었다. 창백하게 질린 황금 같은 머리칼이 어수선하게 흩날리다 이내 차분히 내려앉았다. 생각이 막히면 꼭 이런 식이다. 괜한 불똥이 내게 튀는 건 당연하고.


 "그러니까, 시험 공부 따윈 집어 치우고 내 말 좀 진지하게 들으란 말야!"

 "진지하게 들으라지만, 제가 딱히 할 수 있는게 뭐 있다고..."

 "아니, 분명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걸."


 꼭 남에게 책임을 떠넘길 때만 확신에 차서 말한다. 이 어린애 여신은.


 "넌 나를 불러냈어. 게다가 바로 이 도시, 네가 다니는 학교에서. 무슨 뜻인지 알겠어?"

 "불러냈으니 책임져. 평상시 하던 말과 똑같은 소리 하려는 거죠?"

 "이게 단순히 우연이 아니란 거라고! 좀 자각을 가져!"


 뭔가 떼를 쓰는 아이를 다루게 된 부모의 심정이다. 어떻게 손을 써 무마할 방도가 없어.


 "난 세계수의 여신이야. 이 세계 어느 장소, 어느 누구를 통해서도 불려나올 수 있었어. 나무는 어디든지 있으니까 말야."


 하지만 난 네게 불려 여기에 왔어. 그 말을 하면서 여신은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식으로 누군가가 바라보는 건 낯설었기에 나는 금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때문인지, 다음 순간 들려온 여신의 목소리는 조금 힘이 빠져 있는 것처럼 들렸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은 너말곤 없단 말야..."

 "뭐라고요?"


 여신이 그 뒷말을 흐렸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무슨 얘길 했는지 반문해야 했다. 하지만 여신은 자기가 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내게 가르쳐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러니까! 넌 하루빨리 이 사태의 원인을 찾아내도록. 네가 그 시험인가 뭔가만 볼 수 있게 된다면 만점 맞는 건 보장해 줄테니까. 알았지?"


 알았다며 건성으로 대답을 했더니, 성의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꿀밤을 맞았다. 아프다며 푸념을 하긴 했지만 나는 그이상 여신에게 반발을 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론 계속 여신이 분명하지 않게 얼버무렸던 바로 그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녀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그 녀석이 아직도 여기 있었더라면,'


 어째선지 그 녀석이 누구인가에 대해 나는 한 마디도 여신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결국 그날은 더이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변한게 있다면, 여신의 확정선고가 있었단 정도일까.

 앞으로 3일 후, 세계는 멸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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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이네요.
 날씨가 좋습니다. 하루종일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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