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그드라실! 2화

by 윤주[尹主] posted Apr 15, 201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학교 본관 앞, 그러니까 현관 앞과 운동장 구령대 사이엔 3층 건물 높이를 아득히 뛰어넘는 거대한 나무가 있었다. 히말라야전나무. 언제부터 거기서 자라며 늘푸른 자태를 자랑해왔는지 모를 일이다.

 언제부턴가 그것에 얽혀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졸업한 선배중 하나가(그것이 3년 전 있었던 얘기란 설도 있고, 15년 전이라는 얘기도 있다. 심지어 6.25 전후로 일어났다는 소문도 있고.) 그 나무에 주문을 걸었다는 거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대다수 사람들은 코웃음치기 마련이다. 마술이나 주술 따윈 동화책 속에서나 나올 만한 얘기 아닌가. 산타클로스를 진지하게 믿는 애들도 보기 힘든 시대다. 고3이나 되어서 그깟 괴담 따위 믿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물론 나도 그랬고.

 하지만 이야기 나머지 부분을 듣는 순간, 반신반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그 전나무 주위를 100바퀴 돌면서 빌면 그 해 수능에서 만점을 얻는다더라.'

 상선고, 그러니까 내가 다니는 이 학교는 이 근방에서는 알아주는 명문 고교로 뽑혔다. 평범한 공립학교고 시설이 딱히 좋은 것도 아니지만 졸업한 선배들이 하나같이 우수한 성적, 출중한 실력으로 S대나 K, Y대같은 유명 인서울 대학으로 진학하다보니 자연히 명성이 따라붙은 거다. 거기다 비평준화 지역인 탓에, 중학교 내신 성적이 어느 정도 따라주지 않으면 입학할 수조차 없다. 시내뿐 아니라 인근 교외 지역 학생들까지 내로라하는 실력을 가진 애들이 죄다 우리 학교에 들어오려 안간힘을 쓴다.

 그런 이 학교에 내가 들어오게 된 건, 한마디로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욕심 많은 두 분 부모님께서 일찌감치 지지고 볶은 탓에 억지로 공부를 했지만, 중학교 3년 내내 성적은 기껏해야 학년 중상위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주 좋은 성적도 없었지만 그렇게 나쁜 성적을 받은 적도 없었다는 걸까. 중학교 마지막 학기 내 종합누적성적은 20등이었다. 우리 중학교에서 상선고로 진학한 학생 수가 딱 20명이었고.

 당연한 얘기지만, 고등학교 입학 후 내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내신은 중에서 중하, 모의고사는 어쩌다 중상 한번씩. 3년 내내 학교에서 살다시피하고, 주말에도 입시학원에서 책을 파며 공부한 결과가 그랬다. 한편 내 옆자리에 앉은 짝꿍 녀석은 학원 한 번 다니지 않고도, 그렇다고 딱히 책만 파고 앉아 있는 것도 아닌데도 항상 시험만 보면 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서 놀았다. 어느날 갑자기 내 앞에 악마가 나타나 소원을 한가지 들어준다고 한다면, 난 주저 없이 내 옆에 앉아 있는 그 녀석 머리를 갖고 싶다고 부탁했을 거다.

 좋은 성적은 둘째 치고서라도, 일단 어떻게든 단 한 번이라도 그 녀석을 이겨보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나는 영혼이라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깟 나무 주위 100바퀴 돌기만 하면 수능에서 만점을 얻는다는데, 설령 거짓말이라 해도 해볼만한 일 아닌가?



 전나무 주위를 100바퀴 도는 데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한 번에 100바퀴를 도는 건 인정되지 않는 듯하다. 얘기하는 사람에 따라 말이 다르지만, 대개 하루에 한 바퀴씩 총 100일간을 하루도 빠지지 말고 돌아야 성공한다는 게 정설이다.

 또 나무 주위를 도는 건 반드시 한밤중이어야 한다. 혹은 나무 주위를 도는 걸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소문도 있다. 어떤 경우건, 좌우간 대낮에는 해봐야 소용이 없는 모양이다.

 매일 밤 9시 50분부터 10분간 쉬는 시간이 주어질 때, 나는 애들 눈을 피해 교실을 나섰다. 불이 꺼진 본관 앞 커다란 전나무 아래를 누가 볼 새라 허겁지겁 한 바퀴 돌면서 속으론 간절히 나무를 향해 빌었다. 제발 수능날 만점 받을 수 있게 해주세요. 그게 아니면 최소한 언수외 1등급이라도.

 월요일부터 시작했으니 4일째 되는 날이었을까? 매일 밤 내가 자리를 비우는 게 이상했는지 옆에 앉은 그 녀석이 물었다.


 "너 요새 뭐 하냐? 맨날 꼭 같은 시간에 나가더구만."


 박윤겸. 그게 내 짝꿍 이름이다. 공부벌레도 아니고, 쉬는 시간만 되면 책상에 엎드려 자고, 하지만 항상 성적은 전교 순위권 안을 맴도는 희안한 녀석. 스포츠머리에 촌스런 안경을 쓴 녀석을 보면 절로 '아, 범생이란 게 이렇게 생긴 생명체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된다. 하는 짓이 범생이다운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어떻게 알았는지 녀석은 곧바로 내게 전나무 얘기를 꺼냈다. 내가 얼버무릴 틈도 없이 말이다.


 "이상한 미신 믿고 하는 거면 그만 둬. 괜히 힘빼지 말고."

 "뭐가, 임마."

 "야, 솔직히 이상하단 생각 안드냐? 그 전나무 얘기 말야."

 "글쎄다, 난 딱히..."

 "그게 진짜면, 왜 이제껏 아무도 해봤단 사람이 없겠냐? 하루도 빼먹지 말고 돌아야 한다느니, 아무한테도 들키지 말아야 한다느니, 그런 소문만 무성하지 정작 그걸 해서 됐단 사람은 없잖아."


 "거짓말이면 또 어때! 믿는다고 크게 손해보는 것도 아닌데."

 "휴, 알았어. 믿어서 손해볼 일 없다고 쳐보자. 그럼 너 모레랑 글피에도 학교 나와서 저 나무 밑에서 빙빙 돌게? 바보처럼?"

 "그게 왜?"


 윤겸은 대답 대신 자기 다이어리를 꺼내 보여주었다. 달력이 표시된 페이지였다. 나는 의아해하면서 속으로 날짜를 세었다. 월요일에 시작해 4일 지났으니 목요일이고, 그러면 모레랑 글피는...?!


 "보나마나 생각해본 적도 없지?"


 토요일과 일요일, 두 날짜를 가리키면서 윤겸은 내게 말했다.


 "하루도 빠지지 않는다는 조건을 맞추려면, 평일뿐 아니라 주말에도 학교를 나와야한단 거야. 하지만 주말엔 학교는 쉬고, 게다가 저녁엔 아예 교문을 걸어 잠가버려. 네가 기숙사에 산다면 또 모르지만 말야."


 뒤늦게야 생각한다. 그때 난 바보였음에 분명했다고. 그런 얘기까지 들으면 대부분의 경우, '아, 뭐야 그런가?'라고 생각해버리고 말 거다. 혹은 윤겸에게 '뭐 그런 걸로 잘난척하는 거야? 나도 그쯤은 알고 있었어!'라고 괜히 심술을 부리고 끝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렇구나'라고 순순히 납득하기엔 속이 너무 좁았고, 괜한 심술을 부리기엔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자기 고집이 너무 셌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서, 진심으로 내게 충고하는 윤겸에게 나는 기껏해야 이렇게 오기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


 "너, 내가 하면 어쩔건대?"


============================================

 전공책들을 일부 버렸습니다. 원서책들이었는데, 어차피 앞으로 볼 일 없겠죠??
 행여나 뭔가 찾아보고 싶은게 생겨도, 그때그때 얼른 찾아보기엔 번역서가 더 낫겠지 싶네요...공부하는 동안은 원서도 도움이 그냥저냥 되었지만서도.

 한편으로 느끼는 거지만, 요새는 수험서들도 요점정리가 잘된 책들이 많아서 보기가 좋더군요. 단순히 개념확인만 하는 건 교과서나 일반서적보다도 수험서들이 괜찮은거 같아요~
 또 쓰면 올리겠습니다.

Who's 윤주[尹主]

profile

  "어쨌든 한 인간이 성장해 가는 것은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