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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고백해야 한다. 나는 욀슨 님의 글을 썩 좋아하지 않았었다. '않았다'라고만 해도 충분히 과거형일진데, 굳이 사족인 '었'을 집어넣어 이것이 과거형임을 부득이하게 강조하게 된 것을 독자들은 용서해 주기를. 말이란 장전된 화약만큼이나 민감한 법이다.


 그가 <블리자드 데스티샷 장군과 군인별의 멸망>을 쓰고 다시 <하이 눈-총잡이의 복수>를 썼을 때, 난 그 지독한 해학과 풍자에 불편해졌다. 유명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비롯해 영미권 소설들은 대개 그런 유머 감각을 뽐내곤 한다. 마치 향신료처럼, 적당히 쓰면 소소하게 재미를 주지만 지나치면 역한 기분이 들게 하는 그런 유머들. 위에서 언급한 글들은 그 향신료를 풍성하게 사용했고, 그건 맛보는 사람에 따라 신선한 감각을 일깨울 수도, 역한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는 전략이었다. 마치 낯선 나라의 자극적 토속 음식을 처음 먹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욀슨 님이 새 연재물 <기사를 위한 장송곡>을 선보였을 때, 나는 기대 반 불안 반으로 이 글을 보았다. 전주곡은 불안감을 가중시켰지만, 뒤이은 1악장은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곧 이 작품을 기대를 안고 읽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기사를 위한 장송곡>은 독특한 글이다. 처음엔 공주를 구출하려는 기사, 란 판타지풍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곧 그것은 러브크래프트를 연상시키는 음험한 호러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러브크래프트 식 호러 공식에서도 벗어난다. 일반적인 영웅의 여정을 충실하게 따르는 듯하던 소설은, 마지막 순간 결국 반영웅의 탄생으로 마무리된다. 게다가 작중 곳곳에 등장하는 디테일한 묘사와 구체적 요소들이란! 흑사병에 위협받는 중세풍 마을은 인물 하나하나, 석조 하나하나까지도 그 시대 배경을 뒷받침하는 동시에 기능적이기도 하다. 광대와 대장장이, 흉흉한 교회와 성의 부조들. 각각은 시대상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극중 전개를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판타지의 전개를 생각해보자. 영웅이 사명을 받는다. 그는 처음엔 거부하지만 곧 그것을 거부할 수 없게 된다. 영웅은 이제 조력을 얻어 동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용을 해치우고 돌아와야 한다. 용을 해치우고 돌아오는 길에도 남아 있는 역경과 고난이 영웅을 방해하지만, 그는 끝내 사명을 달성하고 그 보상을 얻는다. 작법 책에도 다 나오는 이야기다. <기사를 위한 장송곡>은 바로 이 '영웅의 여정'을 충실히 재현한다. 거기에 욀슨 님의 치밀한 묘사를 통해 마련된 정교한 중세풍 마을 모습을 떠올려 보라. <기사를 위한 장송곡>은 상당히 전형적인 중세 판타지처럼 보인다. 현실적이고, 수준 높아 보이긴 하지만. 


 <기사를 위한 장송곡>이 색다른 이유는, 그 판타지적 전개와 함께 흐르는 호러적 전개 때문이다. 판타지는 상승하는 이야기다. 영웅이 진정한 영웅이 되건, 평범한 인물이 영웅이 되건, 어쨌건 판타지는 지위 상승과 명예 획득을 향해 상승해가는 이야기들이다. <반지의 제왕>이 그랬고, <해리 포터>가 그랬다.


 반면 호러식 전개는 하강하는 이야기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주인공은 점점 더 난국에 빠진다. 주변 상황은 암담하고 극복하기 어려울 것처럼 보인다. 조력자들은 하나둘 쓰러진다. 적은 주인공이 감당하기는커녕 그 실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커 보인다. 물론 주인공이 그것을 끝내 극복하면서 카타르시르를 유발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판타지와는 달리, 호러 속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적을 완전히 퇴치하지 못한다. 그저 간신히 목숨만 살아남아 본래 세계로 돌아올 뿐이다. <큐브> 시리즈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있었지만 큐브 자체도 사라지지 않고 남았다. 심지어 시리즈를 반복하면서 보다 진화한다!


 <기사를 위한 장송곡>은 마을의 괴이한 분위기, 수상한 교회 등을 정교하게 묘사해 이것이 호러 이야기라는 걸 강조한다. 분명히 러브크래프트로부터 유래했을 법한 요소들, 이를테면 근친혼이라던가, 자신의 끔찍한 혈통을 인식하고 절망하는 주인공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더더욱 이것이 호러, 그것도 러브크래프트 식 코스믹 호러일 거라고 짐작하게 만든다. 러브크래프트 소설들이 그렇듯, <기사를 위한 장송곡> 또한 주인공에게 좌절과 고통을 안겨주며 이야기를 마무리지을 거라고 독자들은 짐작할 것이다.


 앞서 '짐작할 것이다'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기사를 위한 장송곡>이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할 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끝낼 지 정확히 짐작하는 건 어렵다. 이미 얘기한 것처럼 상반된 두 개의 장르, 판타지와 호러 양쪽 요소를 이 작품이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장송곡>을 읽는 도중인 독자는 이 글을 판타지로 기대할 수도 있고, 호러로 기대할 수도 있다. 결국엔 해피엔딩으로 나아가리라 생각할 수도 있고, 배드엔딩이 되리라고 좌절할 수도 있다. 이 불확실성은 매력적이다. 독자들은 자신에게 낯익은 장르 법칙들을 상기하면서 이 작품에 친숙하게 접근했다가, 도대체 이 글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 호기심을 갖고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 의도된 전략이라면, 대단히 기발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기사를 위한 장송곡>이 러브크래프트식 호러라면, 이야기는 용을 마주치고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를 깨닫는 데서 끝이 났어야 했다. 하지만 작가는 이보다 더 나아갔다. 러브크래프트 소설 속 주인공들에 비해, <기사를 위한 장송곡>의 주인공은 더 능동적이다. 때문에 더 치명적이다. 그는 스스로 죽기를 택하지만, 결국엔 용의 자리를 꿰찬다. 에필로그에 잠시 등장한 비망록 속 주인공은 분명 러브크래프트식 호러의 전개를 충실히 따라 몰락할 것이다. 하지만 본문의 주인공은 아니다. 그는 영웅으로서 악을 처단하기 위해 갔다가, 자기 자신이 인류의 적이 되어 버렸다. 욀슨 님은 전형적 판타지 전개를 뒤집어 반영웅 탄생 이야기를 써냈다. 이 결말은 전혀 전형적이지 않다. 판타지로 보던, 호러로 보던.

 정리해보자. <기사를 위한 장송곡>은 전형적 판타지 전개를 뒤집은 반영웅 탄생 이야기다. 호러와 판타지의 융합 덕택에 작품은 더 매력적이고 신선한 것이 되었다. 하나 덧붙이자면, 작품 내 음울한 분위기는 욀슨 님이 가진 유머 감각과 잘 어울렸다. <기사를 위한 장송곡>에서 유머는 너무 홀로 튀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예 죽은 것도 아니어서 진정으로 '양념같은' 역할을 했다. 유머가 없었더라면 이 음울한 이야기는 훨씬 지루해졌을 것이고, 주인공 개성 또한 적절히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만일 이 이야기에 음울한 분위기 없이 유머만 있었더라도 나는 이 작품을 좋아하지 못했을 것이다. 작중 음울한 분위기는 분명하게 유머러스한 서술을 '한 톤 낮춰' 소설 내 다른 요소들과 조화롭게 만들어 주었다. 어색하게 튀거나 불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없었다는 뜻이다.


 욀슨 님의 <기사를 위한 장송곡>을 내가 추천하는 이유는 위와 같다. 조만간 보다 나은 작품으로 다시 욀슨 님 이름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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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욀슨 2012.10.07 19:29
    헙,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가 선물이라도 받은 것 같은 기분이군요. 아마 글을 쓰고 나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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