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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연은 곧 눈을 떴다. 무언가 자신을 덮쳐 올라왔을 때,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손에 든 넷북을 놓치고 눈을 질끈 감았었다. 한참이 지나도 무언가 피부에 와 닿는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지나치게 주변이 고요해졌다는 게 굳이 변화라면 변화일까.

 눈을 뜨자 그녀는 곧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쩐 일인지 주위가 시커먼 어둠에 파묻혀 한치 앞조차 볼 수 없었다. 기껏해야 손을 뻗어 닿는 부위까지가 그녀가 볼 수 있는 전부였다. 게다가 아무리 손을 뻗어 주위를 더듬어 봐도, 방금 전까지 곁에 있던 시현이나 반려 아가씨는 찾을 수 없었다.

 신부의 짓이다. 진연은 금세 상황을 파악해냈다. 이전 같으면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기이한 현상에 놀라 허둥지둥 대기만 했을 것이다. 지금은 달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랑하는 딸과 마녀 일행이 벌인 싸움을 지켜봤기에, 진연도 지금 눈앞에 벌어진 일들이 신부가 펼친 마법 탓이리란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눈치 채는 것 그 이상은 할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좀 더 차분해지고 안정되었다. 남은 건 이제 탈출 방법을 찾는 것뿐이다.


 "아까 그 넷북이 있으면 좋을 텐데."


 혹시나 싶어 발밑을 더듬어 봤지만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진연은 생각에 잠겼다. 문득 사랑하는 딸과 싸울 때 생각이 났다. 반려 아가씨와 싸울 때, 사랑하는 딸은 잠시 동안 반려와 마녀에게 환각을 보여준 뒤 빈틈을 노려 공격했었다. 이것 또한 마찬가질까? 끝을 알 수 없는 이 어둠 역시 신부가 보여주는 환각인 걸까?

 그때 그 환각 너머로부터 누군가 천천히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진연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까진 다가오는 사람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설마 이게 무서워?"


 곧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무척 낯이 익었다. 하마터면 진연도 반가운 마음에 소리칠 뻔했다. 그러지 않은 건 이 모든 게 신부가 보여주는 환상일 거란 생각 탓이었다.


 "사라져. 그런 환상 따위에 속지 않을 테니까."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누구 더러 환상이래?"

 "좀 더 그럴듯한 환상을 보여줬다면 속았을 지도 몰라. 하필이면 왜 쟤야? 웃기지도 않아서."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인 건 맞지?"


 환각은 영문을 모르겠단 듯 물었다. 그 천연덕스런 말투가 환각이 묘사한 본인을 떠올리게 해 진연은 짐짓 화가 치밀었다.


 "환각이 아니라면 말해봐. 왜 네가 여기 있어?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 아가씨라던가, 그 아틀라스란 꼬마라던가, 아니면 바리라던가. 하지만 넌, 넌 절대 여기 있을 리 없어. 잡아먹혀버렸잖아, 그 개한테!"

 "아, 그거?"


 마녀는 태연스레 진연 앞에 다가와 섰다. 진연이 팔을 뻗어 닿는 거리 안까지 다가와, 마녀는 물끄러미 진연을 내려 보았다. 새삼스럽지만 마녀는 키가 큰 편이었다. 그리 작은 편은 아닌 진연조차 바로 앞까지 다가온 마녀를 쳐다보려면 고개를 들어야 했으니까.

 그 상태로 마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잠깐 방심했던 거였어. 그래도, 그 녀석 입 안에 막상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정신을 차렸지만. 언제 나가야 할지 타이밍을 재고 있었는데, 결국엔 등장할 기회가 끝까지 없었지 뭐니?"

 "그 말은, 거기서 다 보고 있었단 말야? 내가, 네 반려가 당하는 모습을?"


 환각이지만 어쩜 이리도 재현을 잘 해 놓았는지. 진연은 슬슬 뚜껑 열리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눈앞에 선 이 여자는 마녀와 닮아 있었다. 외양도, 목소리도, 심지어 그 짜증나는 태도까지도. 그 때문에, 그 환각이 마침내 자신의 질문에 천연덕스레 답했을 때 진연은 손을 번쩍 들어 올려 뺨을 치려했다.


 "응, 맞아."


 하지만 마녀는 곧바로 진연 손을 허공에서 붙들어 잡았다. 다른 손으론 진연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진연이 손을 빼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자, 마녀는 그 힘을 이용해 마치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그녀와 함께 빙그르르 돌고 몸을 흔들며 익살스럽게 주위를 방방 뛰어다녔다.


 "이거 놔! 이거 놓으란 말야!"


 놀라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진연은 소리를 질렀다. 마녀는 들은 척 만 척 춤을 계속 췄다. 지나치게 빙빙 돈 탓에 진연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마녀가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페이스에 억지로 맞춰지느라 그렇지 않아도 지친 몸이 나른해졌다. 진연이 힘이 빠져 축 늘어지자, 마녀는 그녀 손을 다시 놓아주었다. 한 쪽 어깨에 올린 손은 그대로인 채였다.


 "대체 무슨 생각이람? 신부는……."


 지쳐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진연을 보며 마녀는 혀를 찼다.


 "그러니까, 왜 지금 이 시점에 신부 얘기를 하는 거야? 아직까지 날 환각이라고 생각해?"

 "그럼 아냐?"

 "참 나, 아니 됐어. 너 좋을 대로 생각하셔그래."


 지친 진연을 자리에 내려놓고 마녀는 주위를 한 번 빙 둘러 보았다. 뭔가를 발견했는지, 그녀는 어딘가로 뚜벅뚜벅 걸어가 사라져 버렸다. 진연이 막 숨을 돌려 일어나려던 찰나 마녀는 다시 그녀에게로 되돌아왔다. 반려 아가씨를 품에 안고, 시현은 옆에서 따르게 한 채였다.


 "진연 씨, 괜찮아요?"

 "혹시 이것도 환각이야?"


 진연은 어리둥절해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녀는 한숨을 푹 쉬더니 돌연 진연 이마 위에 손가락을 툭 튕겼다.


 "아야!"

 "이제 그만 꿈에서 깨셔, 잠꾸러기 아가씨. 집에 갈 시간이야."

 "어떻게 할 생각이죠?"


 시현이 마녀에게 물었다. 마녀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살폈다. 천장 역시 진연 눈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고 검은 안개가 짙게 뒤덮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긴 신부 그 년이 만들어낸 얼음 속이야."


 그것이 마녀 눈엔, 그 끝이 확실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마녀는 자신 있게 일행에게 말했다.


 "얼음이라면 별다른 수가 없잖아. 안에서 깨고 나가거나 밖에서 쪼고 녹여 내거나."

 "할 수 있어요?"


 "당연하지,"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마녀는 품에서 향을 꺼냈다. 향은 마녀가 손짓하자 자동으로 불이 붙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녀에게 불가능한 건 영원히 안식하는 것뿐이거든."


 향 연기는 뭉게뭉게 피어올라 검은 안개를 거두어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진연 눈에도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작게 쩡, 하고 얼음이 깨어지는 소리가 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무슨 일이야?"


 신부가 이상 현상을 눈치 채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미처 대처할 기회는 없었다. 채 손을 쓰기도 전 얼음들은 굉음을 내며 산산 조각나 바닥에 흩뿌려졌기 때문이다.

 얼음이 깨어지며, 그 속에 가득하던 검은 안개가 퍼져 나와 사방을 뒤덮었다. 그 혼란 속에서, 신부는 어렴풋이 얼음을 깨고 나온 그들 모습을 보았다. 자기가 가두어놓은 세 명 여자와, 어딘가 낯이 익은 키 큰 여자 한 명. 기억엔 분명 자기가 가둬놓은 여자는 세 사람이었다. 그들이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기 전 신부는 그 키 큰 여자가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떠올린 이후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는 이름,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신의 부모.


 "마녀, 넌!"


 신부는 재빨리 총을 꺼내어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쏘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마녀 일행이 모습을 감춘 검은 안개 속으로 뛰어들어 그들을 찾았다. 처음엔 자신이 만든 안개니까 거둘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몇 차례 시도해봤지만 안개는 전혀 걷히지 않았다. 이유는 금세 알았다. 이 짙은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뒤섞인 마녀의 향냄새를 신부도 맡을 수 있었다.


 "칫."


 이대로 마녀가 안개 속을 빠져나가 도망치게 놔둘 수는 없다. 신부는 곧바로 자기 괴물들을 불러냈다. 웨딩마치에서 떨어져 나온 그들은 신부에게서 나왔으면서도 신부에게 저항하지 않는, 얼마 되지 않는 귀중한 녀석들이었다.

 붉은 네 개 눈을 가진 커다란 사냥개 같은 괴물 서넛을 불러놓고, 신부는 그것들 머리를 하나하나 쓰다듬었다. 그것들이 주인이자 부모에게 아양을 부릴 시간도 주지 않고, 신부는 검은 안개 속을 가리키며 그것들에 명령했다.


 "전부 물어뜯어. 하나도, 남김없이."


 이빨을 드러내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그것들을 보면서 신부는 권총을 장전시켰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고함 소리와 달음박질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또 다른 곳에서 언뜻언뜻 그림자 같은 게 안개 속에 파묻혀 어른거렸다. 차분하고 신중하게 걸음을 옮기며 신부는 그 중 한 방향에 총을 겨누곤 망설임 없이 쏘았다.






 "꺅! 위시현, 얘!"


 신부를 피해 도망치던 진연은 눈앞에서 무언가 육중한 것이 시현을 덮치곤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걸 보고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시현은 정신만은 멀쩡한 듯했다. 머지않은 곳에서 심한 몸싸움이 벌어진 듯 소란스러웠고, 그 속에서 시현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신경 쓰지 말고 도망가요! 뒤쫓아 오는 건 이 녀석 한 마리가 아닐 거예요!"


 시현이 하는 말에 진연은 다시 긴장해 주위를 살폈다. 얼음 속에 있을 때보다 시야는 넓어졌지만 그래봐야 반경 1, 2m 정도에 불과했다. 시야 안에 들어오는 적은 없지만, 어쩌면 시야 저 밖에서 그녀를 노리고 접근해오는 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진연은 주의를 기울이며 시현이 목소리를 낸 방향으로 다가갔다. 여차하면 그녀를 도와주고 함께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시 시현의 목소리가 진연을 말렸다.


 "뭐하는 거예요, 도망치라니까! 난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요!"


 잠시 주춤대던 진연은 결국 마음을 다잡고 그 자리를 떠나 도망쳐갔다. 진작 그렇게 하지는. 시현은 조금 안심했다. 바로 눈앞에 거대한 들개 같은 괴물이 이빨을 드러내고 있어 도무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했다.

 '그녀는 다음번에 다시 만나 제대로 인사해야겠지.' 속으론 그렇게 말하며 시현은 눈앞에 놓인 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녀석은 언제라도 달려들 수 있단 듯 으르렁대며 몸집 작은 시현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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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크릿>은 드디어 최종장에 도달했네요. 에필로그가 있긴 하지만, 사실상 11장이 마지막 챕터라고 생각하셔도 될 겁니다.

 결말까지 많은 분량이 남지 않아서, 우선 <시크릿>을 5월중 완결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연재 주기가 바뀌어야겠죠.
 기존 4일에 한번 꼴로 올라오던 <시크릿>은 완결 전까지 이틀에 한 번 꼴로 올라오게 됩니다. <LDK>는 당분간 연재 중단이 되겠죠. <시크릿> 완결이 나면 다시 연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27일, 31화 올리는 걸로 찾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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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클레어^^ 2011.05.26 08:10

    와아~. 마녀씨 무사했군요.

    그나저나 이번엔 시현씨가 위험하네요.;;

  • profile
    윤주[尹主] 2011.05.26 16:33

     위시현은 여기서 일단 퇴출시킵니다...진연이나 마녀, 신부 이야기 이끌어가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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