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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을 열고 빠져나온 세 사람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참혹했다.

제대로 서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거대한 물결에 한꺼번에 휩쓸리기라도 한 양, 모든 것들이 그들 발아래 일제히 누워 있었다. 풀도, 나무도, 심지어 그 수많은 그림자들도.


 "바리는 어떻게 된 걸까?"


 진연이 물었지만 위시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동안 그들은 참상 위를 눈으로 훑으며 자신들에게 친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간절히 바랐다고?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발견하지 못하길 바랐던 건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이건 진연은 바리가 살아 있어 주기 커다란 만을 기대했다.

 침울한 얼굴로 세 사람은 그 전장을 통과했다. 여전히 그들은 그림자의 땅에 있었고, 때문에 하늘은 종잡을 수 없이 우중충했다가도 밝아지길 반복했다. 진연은 이 장소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빠져나가고 싶어 했다. 왕좌를 되찾기 위해 이곳에 왔었다. 죽은 엄마 윤주와 화해하기 위해 여기에 왔었다. 모든 것이 끝난 지금 진연에겐,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게 느껴졌다. 마녀는 적막에게 먹히고, 바리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반려 여자는 심한 상처를 입고 정신을 잃었다. 왕좌를 구하긴 했지만 자기가 조금만 더 능력이 있었더라도 사랑하는 딸 역시 구할 수 있었을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도 엄마 윤주에 대해선,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겠다 싶을 뿐 완전히 화해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허탈한 마음을 잊기 위해서라도 이곳에서 한시바삐 떠나야 한다. 진연은 그렇게 생각해서 지친 발걸음을 계속해 재촉했다.

 마치 모든 게 끝난 것처럼 보였다. 진연도, 심지어 시현조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들 앞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일행은 예상치 못한 그 조우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어서와,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어."


 어째서 신부가 여기에? 진연은 어리둥절했다. 사랑하는 딸과 싸워 이기면, 왕좌를 빼앗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어? 그녀는 시현을 빤히 쳐다보며 설명을 요구했다. 시현도 영문을 모르겠단 듯 고개를 저었다.


 "왜 그래, 다들? 내가 반갑지 않아?"


 깔깔 웃으며 신부는 그들에게 조금 다가섰다. 동시에 진연은 반려 아가씨를 부축한 채 조금 뒤로 물러섰다. 뭔가 일이 잘못 되어가고 있었다. 저 여잔, '아이슬란드의 신부'는 지금 여기 있어선 안 된다.


 "사랑하는 딸과 싸우고 오는 길인가보지? 아틀라스가 곁에 있는 걸 보니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죽기라도 했어?"

 "너, 네가 왜 여기 있어? 어째서 사랑하는 딸과 같이 사라지지 않은 거야?"


 진연이 묻자 신부는 또 한 차례 소란스레 웃었다.


 "이건 장기나 체스 같은 게 아냐. 현실이지. 왕이 죽는다고 끝나는 그런 게임이 아니란 말야."

 "하지만 웨딩마치가 오고 있죠. 당신은 괜찮나요? 그들과 마주쳐도."


 시현이 신부에게 물었다. 신부는 조금 인상을 찡그렸다.


 "그것들이 어쨌다고?"

 "이제껏 그것들을 피해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던 거잖아요. 그 덕분에 세상이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지만요. 괜찮아요? 이 나라에도 금방 올 거예요, 저들이."

 "난 그것들 피해 도망친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도망쳐 다녔단 소리에 신부는 기분이 나빠 보였다. 그녀는 전혀 뜻밖인 얘기를 꺼냈다.


 "도망쳐 다닌 건 마녀잖아. 내가 아니라."

 "무슨 소리죠?"


 시현에게도, 진연에게도 예상 밖인 말이었다. 신부는 잠깐 동안 마녀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동안 그 년 있는 곳을 찾아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어. 그 여자 가슴팍에 총탄 박아 넣지 않고선 참을 수가 없을 거 같아서. 마녀 그 년은, 어떻게 알았는지 꼭꼭 숨어서 찾아낼 수가 없더라? 덕분에 지구 반 바퀴는 돌아온 기분이야. 웨딩마치는, 그것들은 그냥 그런 내 뒤를 귀찮을 정도로 끈질기게 따라온 것뿐이고."


 '멋대로 태어나고, 멋대로 앙심품곤 쫓아오는 거야.' 마녀의 그 말이, 신부 얘기를 듣는 진연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제야 진연은 깨달았다. 마녀는 신부와 웨딩마치 얘기를 하는 것처럼 꾸미곤, 실제론 자기와 신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너 정말 마녀 딸이로구나."

 "그래, 이제 알았어?"


 진연이 꺼낸 말을 신부는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진연 곁에 있던 시현이 그런 신부에게 말을 걸었다.


 "보다시피 마녀는 여기 없어요. 딴 용무 없으면 길 좀 비켜 줄래요?"

 "그래, 정말 아쉬워. 내 손으로 결판 짓기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말과는 달리 신부는 품에서 구식 권총을 꺼내어 탄알을 장전했다. 그 모습을 본 시현이 다시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은 마녀에게 원한이 있는 거잖아요. 여기 진연 씨나 저와는 아무 상관없고요. 그러니까 보내 주세요."

 "뭘 모르나본데,"


 신부는 그런 시현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정 그렇게 가고 싶다면 그 애를 놓고 가. 거기 피투성이 아가씨 말이야. 마녀의 반려라는."

 "이 사람도 상관없잖아요, 당신과."

 "마녀와 상관있잖아. 반려라면서. 반려라면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신랑과 함께 나눠야하는 것 아냐?"

 "처음부터 우릴 보내줄 생각 없었지?"


 진연이 뭔가를 눈치 채곤 신부에게 물었다.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처음부터 보내줄 생각은 없었어. 한 사람은 마녀의 자매이고, 또 한 사람은 마녀의 반려인걸. 다른 하난, 글쎄, 덤인 셈 칠까?"

 "대체 왜 그렇게 마녀를 싫어하는 거야?"


 진연은 다시 신부에게 물었다. 신부는 잠시 손을 멈추곤 진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하고 신부는 입을 떼었다.


 "그러니까, 경우에 따라선 낳은 부모가 저주스러울 때도 있는 거야.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지긋지긋하게 싫을 때, 살아있는 게 끔찍이도 고통스러울 때, 태어나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일 겪지 않았어도 되지 않을까 싶을 때."


 이야기할 때 신부 눈초리는 조금 슬퍼 보였다. 진연은 금방이라도 신부가 그 자리에서 왈칵 눈물을 쏟진 않을까 생각했다.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두 사람을 바라본 신부는 그러나, 끝끝내 눈물 한 방울 그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이 이상 당신들한테 설명해 줄 필요는 없잖아. 이제 됐어. 당신들은 그냥 내가 괴롭히는 대로 전부 받아주다가 죽어주면 그만이니까."

 "누가 가만히 당하고만 있는데요? 진연 씨!"


 갑자기 시현이 진연에게 제 넷북을 내밀었다. 사랑하는 딸 때와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모든 준비를 끝내놓고 시현은 진연이 최종 허가를 내려주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처럼 해 주세요, 빨리!"

 "그렇게 둘 순 없어."


 신부가 손을 쓰자 돌연 세 사람 발아래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차, 하는 사이에 세 사람은 제각기 다른, 커다란 얼음덩이 속에 파묻혀 그대로 갇혔다.

 진연이 놓쳐 바닥에 떨어진 넷북 쪽으로 신부는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던 신부는, 손에 들린 화승식 옛 권총을 그것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넷북 자판과 모니터 화면은 총알이 통과해 박살나 버렸다.

 총을 다시 제 품에 집어넣은 후 신부는 얼음 속에 갇힌 일행을 찬찬히 살폈다. 진연과 반려 아가씨. 마녀에게 있어 가족이라 할 만한 이들. 그들을 보면서 신부는 주먹을 꾹 쥐었다. 용서할 수 없어. 마녀에게 가족이 있단 건 용납하지 못해. 하물며 반려라니! 결혼 상대라니!


 "……아직도 생각나. 처음 눈을 떴던 곳이. 온통 새하얀 얼음 천지였고, 제 몸 역시 커다란 얼음덩이 위에 실려 바다 위를 정처 없이 흘러 다니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던 그 때가."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확실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처음부터 자신은 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단 것, 다른 정령들과 마찬가지로 이 지구상에서 금방이라도 사라질 운명이었다는 것 정도만 어렴풋이 알았을 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 나도, 당신들처럼 평범하게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하는 주례사를 들으며, 소박한 축복과 행운을 비는 인사를 받으며 하객들 사이를 신랑과 함께 지나고 싶었어."


 그때 거기에 무식한 인간들이 나타났었지. 거기까지 떠올린 신부는 잠시 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인간들은 정령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결혼식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커다란 배를 타고 나타난 그들은, 유빙 위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정령들을 마치 바다사자나 펭귄 무리쯤 되는 걸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탕, 탕, 하는 요란스런 소리와 함께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외양을 한 하객들이 하나둘 쓰러져 피를 흘렸다. 결혼식 무대는 삽시간에 비명과 울부짖음으로 뒤덮였고, 공포와 혼란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정신없는 가운데 새 신부는 제 곁에 나란히 서 있던 신랑을 끌어안았다. 차갑게 식어가며 그가 흘린 붉은 피가 신부의 하얀 드레스를 시뻘겋게 물들였다.

 바로 그 일 때문에 인간들에게 보복하고자 했다. 처음엔 불법 조업 중인 그 포경선을 덮치고, 맨 처음 상륙한 육지에서 난동을 부려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그녀가 아이슬란드의 신부라고 불리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웨딩마치가 그녀 뒤를 쫓게 된 것도 이 전후쯤이라고 신부는 기억했다. 그녀는 아이슬란드에서 아일랜드로, 영국으로 계속해 남동 진했다. 대륙에 상륙해서는, 갑자기 방향을 틀어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이탈리아로, 그리고 다시 프랑스로, 스페인으로……. 그녀는 미국 동부 해안에 다다른 직후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여전히 인간들에 대한 분노는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때, 그녀는 어렴풋이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려냈다. 자신은 마녀란 인물 때문에 이 세계에 태어났다. 마녀가 아니었다면 그녀도 이런 세상에 태어나, 이런 식으로 고통 받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고통 받아야 할 사람은 마녀가 아닌가?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는 아픔, 삶을 저주할 만큼 지독한 슬픔을 겪어야 하는 건 신부 자신이 아니라 마녀여야 하는 게 아닐까?

 신부도 알지 못한 사실이 있긴 했다. 그녀가 자신을 낳은 마녀를 원망하듯이, 마녀 역시 엄마 윤주를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것. 신부 자신이 깨닫지 못한 사이 낳은 자식들 '웨딩 마치' 역시 엄마인 신부를 미워해 그녀를 끈질기게 뒤쫓아 올 거란 사실을 신부는 알지 못했다. 사실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신부 자신이 마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실은 마녀에게서 유전된 거란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까? 기뻐할까? 슬퍼할까? 아니면 이 모든 관계를 끔찍이 여기고 전부 완전하게 끝내려 할까?

 얼음 속에서, 서로를 돌보지 못하고 제각기 갇힌 세 사람을 보면서 신부는 만족해했다. 사실은 그녀 역시 보다 큰 단절 속에 갇혀 있는 걸 깨닫지 못하고서.



===============================

 <시크릿> 10장 올립니다.
 이번 장은 짧은 편이라, 한번에 몰아서 올립니다. 다음에 올릴 30화는 <시크릿> 11장이 되겠지요.

 신부의 배경에 대해서 딱히 더 설명은 않겠습니다. 본래 조연으로 설정했던 캐릭터라,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생각은 없었거든요;; 아마 고치면서는 이 얘기가 보완될 거 같긴 합니다만...

 그러면 이번 화도, 즐겁게 봐주셨으면 좋겠네요^^;;;
?
  • profile
    클레어^^ 2011.05.21 23:24

    흐음... 신부 의외로 불쌍한 캐릭터네요.

    그나저나 그 넷북... 비쌀텐데...;; 아직 약정도 안 끝난 건 아닌 건지...

    주인공들은 이대로 얼음 속에 갇히는 건가요?

  • profile
    윤주[尹主] 2011.05.22 01:28

     넷북은 괜찮아요, 사실 저 넷북, 업무용이라 자비로 산 것도 아니라는(?!)

     물론 농담입니다;;


     신부는...불쌍하죠. 초고 뽑고 이래저래 살펴보다가, 캐릭터 되짚어보고 좀 몹쓸 짓했다 싶었어요;; 근데 퇴고하면서는 지금보다 더 불쌍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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