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13 18:16

이그드라실! 19화

조회 수 471 추천 수 0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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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모든 것을 잊었다. 수학 선생님은 몸 멀쩡히 학교에 나오셨고, 선예와 관련된 흉흉한 사건은 신문 지면에서는 물론 주위 사람들 뇌에서도 말끔히 지워졌다. 아, 집도 멀쩡해졌다. 다음날이 되자 아버지께선 아무 일 없었단 듯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시고, 어머니께선 찬장 그릇들에 먼지가 너무 쌓여 있다고 투덜대셨다. 내 방 창문도 깨지기 전 그대로 되돌아왔다.

 이제와 생각하건데, 이그드라실은 정말 여신인지도 모른다. 요즘 세상에 이 정도 기적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진짜 여신밖에 없을 테니까. 학교로 향하면서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교문 앞에서 나는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을 만났다.


 "선배, 안녕하세요?"


 수수한 하늘색 민소매 원피스에 안이 비쳐 보이는 흰색 반팔 모시 티를 위에 걸쳐 입은 차림으로, 선예는 다소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등교 시간이라 주위엔 같은 학년 친구들이 많았다. 질투와 호기심, 약간의 비웃음섞인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선예에게 다가갔다. 그래, 가끔은 이런 때도 있어야지.


 "어쩐 일이야?"

 "그게, 저...실은 어제 꿈이,"

 "꿈?"

 "...역시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편리하게도, 선예는 오늘 새벽 겪은 일들이 전부 꿈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선배, 아니 선호 오빠."


 잠시 더 무언가를 생각하던 선예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런 말하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아니 평소에도 자주 보는 사이고, 이웃이고, 학교도 옆이고, 그래서 제가 굉장히 뜬금없는 얘기를 하는 건지도 모르지만요."

 "선예야."

 "네, 네?"


 내가 자기 이름을 부르자 선예는 눈에 띌 정도로 당황해했다. 귀여운 얼굴이 금새 농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그 반응으로 나는 그녀가 지금 무슨 얘기를 꺼내려는지 미루어 짐작했다. 알아차리지 못한 양 시치미떼긴 했지만 말이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속시원히 해버리는 게 나아.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하니까 말야."

 "선배?"


 아마 선예에겐 낯선 모습일 것이다. 이전까지 난 남들에게 참견해본 적도 없었고, 내 생각을 속시원히 밝힌 적도 없었다. 어제, 아니 오늘 새벽까지만 해도 그랬다.

 선예는 조금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오늘 선배는 평소와는 좀 달라 보여요."

 "..."

 "하지만 뭐랄까, 전 지금 선배 모습이 더 좋아요. 그러니까, 더 허물없어진 듯하달까요?"


 선호 오빠, 라고 선예는 다시 한 번 나를 불렀다.


 "저랑 사귀어 주세요."


 예상했던 말이었다. 솔직히 조금 얼떨떨하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해야할 말이 뭔지는 나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해. 지금은 안 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않겠니?"

 "...이유를 얘기해주실 수 있어요?"


 조금 실망한 듯 선예가 물었다. 이유라고? 그야 당연한 게 아닌가.


 "나 이제 세 달쯤 뒤에 수능이거든. 그때까진 기왕이면 공부에 집중하고 싶어."

 "그럼 저 그때까지 기다려도 되나요?"

 "그때도 마음이 남아 있으면."


 그 뒤로 헤어져 인사를 나누며 돌아가는 선예 얼굴은 좀 전보다는 살짝 밝아진 것처럼도 보였다.

"잘 됐지 않느냐. 결과적으론."

 어느샌가 나타난 여신이 내게 말했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듯했다.
 여신을 곁눈으로 흘기며 나는 목소리를 낮춰 여신에게 말했다.

 "잘 되지 않았어! 모두 다 원래대로 돌아간다며!"
 "그 말대로다. 다 원래 상태이지 않느냐?"
 "원래라면 쟤가 나한테 고백할 리가 없지!"

 집으로 돌아가는 선예 뒷모습을 가리키며 내가 말했다. 내 반응을 본 여신은 킥킥대며 웃었다.

 "그것도 내가 미리 말하지 않았더냐? 감정은 불씨다. 한 번 불붙은 감정이 설령 사그라진대도, 기억은 설령 하지 못한대도 마음 속 불꽃이 크게 일었던 경험은 알게 모르게 남아 있는 거다. 자신의 신체에 혹은 그 내면에 말이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잘 되지 않았느냐? 달리 사귀는 여자도 없으면서,"
 "...네가 그 말을 하면 왠지 기분 나쁘게 가슴이 아픈데,"
 "무슨 말 했느냐?"
 "아니, 됐어."

 일부러 여신을 외면한 채 나는 다시 교실로 향했다. 불씨 때문에 선예는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고, 불씨가 사그라진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열병에 들뜬 사람처럼 착각에 빠져 내게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시간이 좀 더 지나 기억도 경험도 모두 잊게 되면 선예도 아마 다른 진짜 사랑을 찾을 수 있게 될 거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내게는 억지로 불씨를 끌어낸 기억도 있고, 그 특별한 경험 또한 잊지 않고 있다. 이런 내가 선예 같은 착각에 빠지지 않고 계속 평범하고 태연한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을까? 예전과 같이, 시험지와 문제집에만 파묻힌 채로.

 내가 여신에게 고백하는 일 따윈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걸음을 재촉하는 와중에도 나는 마음 속으로 거듭 되뇌고 또 되뇌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문제집을 풀고, EBS 시청을 하고, 그러다 점심이 되어 교문 밖으로 나갔다. 비빔밥을 시켜 먹고 나와 윤겸과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사 물고 다시 들어오는데, 또 한 사람 낯익은 인물이 교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겸이 그 인물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뭐야? 혹시..."

 "미리 얘기해두지만 바바리맨 아니야."

 "애들한테..."

 "전화하지마, 모아들이지 마, 지금 거기 휴대폰에 올려놓은 손 떼."


 이미 한 번 겪어 익숙해진 패턴에 전부 응한 뒤, 윤겸에게 조금 있다가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윤겸은 나와 낯선 남자를 번갈아 보며 이상하게 여겼지만 순순히 헤어져 교실로 먼저 돌아갔다.

 둘만 겨우 남게 되었을 때, 나는 남자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여신이라면 저희 집에 있어요. 별일없이 잘 지내고 있고요."

 "그런 거 같더구나. 좀 힘들었지? 요 며칠 사이는."

 "어제가 피크였죠."


 내 말에 웃으며, 남자는 들고 있던 음료수 하나를 내게 던져 주었다. 남자가 준 캔커피를 보며 나는 말했다.


 "저 커피 안마시는데요."

 "무슨 남자애가 그렇게 까다롭냐, 넌?"

 "컨디션 관리중이거든요.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쳇, 혀를 차면서 남자는 다른 캔을 마저 내게 던졌다. 이번엔 커피도, 탄산도 아닌 보통의 캔음료수였다. 내가 남자에게 커피를 돌려주려 하자,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받지 않았다.


 "친구에게라도 주지 그러니?"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나중에 수학 선생님 자리에 몰래 올려놔야겠다.

 한 차례 인사를 주고받는 게 끝나자, 나는 슬슬 하려던 얘기를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체 그 애, 여신은 정체가 뭐죠?"

 "솔직히 나도 잘 몰라."


 남자는 살짝 고개를 젓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원했기 때문에 걔가 나왔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내가 원하기 전부터 그 애는 거기 전나무에 있었던 건지도 몰라."

 "당신도 그 애를 믿지 않았나요?"

 "나는 유다야. 배신한 신도 말이지. 그 애를 믿는다고 말해 놓고, 정작 중요한 순간 그 애를 믿지 않았어. 세계가 위기에 처한다는 그 말 말야."

 "당신도 그 얘길 들었단 말예요? 그리고 믿지 않았다구요? 그럼 어째서 세계는 멸망하지 않고 그대로죠?"

 "적어도 내 세계는 멸망했어. 내 삶, 주변 사람들의 생활, 그런 것들을 한데 묶어 하나의 작은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지."


 남자는 걸치고 있던 바바리 코트 팔을 살짝 걷어 내게 보였다. 털 하나 없이 깨끗한 남자의 팔은 그러나, 얼룩덜룩한 피부 탓에 징그러워 보였다. 상처에 돋는 새 살처럼 하얀 피부가 약간 태운 피부색 군데군데 번져 있었다. 남자는 그것이 화상 자국이라고 말했다.


 "동생이 아직 병원에 있어. 누군가 집에 불을 냈거든. 물론 난 불을 낸 게 누군지 알고 있었지. 여신 말대로, 상태가 이상해진 녀석이 하나 있었거든. 경찰에겐 입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래야 내가 직접 그 녀석에게 복수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 사람은 지금 어떻게 됐죠?"


 조금 섬뜩하긴 했지만, 호기심 탓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는 조금 쓸쓸한 눈을 하고 먼 산을 바라보았다.


 "내가 찾아갔을 땐, 걘 이미 자살한 뒤였어. 내가 병원에 실려간 날 그랬다더라. 나중에 유서를 보니까, 기절한 내가 미동도 않고 엠블런스에 실려가는 걸 봤나봐.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선 스스로 목을 멨다더군."

 "..."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넌 그 황당무계한 얘길, 적어도 마지막엔 믿어줬잖니."

 "그럼 어째서 전엔 그런 소릴 한 거죠? 당신이 전에 내게 한 얘기 말예요. 내가 그 말을 믿었더라면, 여신을 믿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했어요!"

 "때로는 '악마의 변호사'도 필요한 법이야."


 내 항변에 남자는 태연히 답했다.


 "진짜 네가 그 애를 믿기 위해선, 적당한 시련을 통해 자기 검증이 필요했단 거지. '과연 나는 정말 이 여신을 믿는가?'를 스스로 반문할 만큼 강한 시련이 말야. 그걸 극복한 사람들은 대개 여신을 결코 부정하지 않게 돼. 난 단지 그런 사람들에게 아슬아슬하게 극복할 수 있을 법한 시련을 쥐어주는 것 뿐이야."

 "...언제부터 이런 짓을 했죠? 당신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그 악마의 하수인인가 하는 역할을 했냐고요."

 "열 손가락 넘어간 이후론 햇수를 세지 않기로 했어."


 자칭 유다라고 하는, 여신의 광신도가 말했다.

 그 뒤 남자는 여신에겐 자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아달라고 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 자리를 애써 외면해 피했다. 여신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남자 얘기를 꺼냈다간 여신은, 또 전처럼 애틋한 표정을 하고서 그를 추억할 것이다. 그런 미친 남자 생각에 여신이 슬퍼하는 모습을, 나는 결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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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일담 이어 올립니다. 고민 끝에, 나누어 올리는 편이 낫겠다 생각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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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乾天HaNeuL 2012.05.14 22:17
    오잉..;
  • profile
    클레어^^ 2012.05.15 04:40
    이야~. 완결 축하해요.
    이제 이것도 완결소설로 가는 건가요?
  • profile
    윤주[尹主] 2012.05.15 04:44
    5/14일 글 조금 수정합니다. 선예와 헤어지고 난 직후에 추가된 장면이 있어요.

    클레어^^님// 감사합니다~ 완결 신청은 조만간 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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