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10 18:14

이그드라실! 16화

조회 수 500 추천 수 0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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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덮쳐오는 불길을 간신히 피한 뒤, 나는 방문을 열고 거실로 뛰쳐나갔다. 선예는 둥실둥실 떠있는 채 깨진 창문을 그대로 통과해 집 안으로 들어왔다. 등 뒤로 바짝 붙어 쫓아오며 검은 불길을 날리는 선예 모습은, 당연한 얘기겠지만, 초현실적으로 보였다.


 "어, 어째서 공중에 떠 있는 거야!"

 "여자아이는 가볍거든요."

 "어째서 불 같은 걸 쏠 수 있는데!"

 "여자아인 은근히 뜨겁답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요."

 "뭐든 여자아이기 때문이라고 얼버무리지 마!"


 소파를 이리저리 밀면서, 나는 선예를 피해 한동안 거실 안을 빙빙 맴돌았다. 선예가 뿜는 불꽃에 소파 가죽은 담배빵이라도 한 양 구멍이 크게 뚫리고 목제 가구들은 표면이 새카맣게 그을렸다. 이대로라면 설령 선예에게서 도망쳐도 어머니께서 용서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저기, 왠만하면 우리 말로 하지 않을래?"

 "그럼 키스해 줘요! 이 글 통틀어 세 번이나 말했다구요!"

 "무슨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조금 협상하지 않을래?"

 "여자아이한테 부끄러운 소리 너무 하게 하는 것도 좋지 않아요, 오빠."

 "아니, 그래도 오랫동안 알고 지낸 이웃 동생인데 갑작스럽게 키스한단 것도 좀 그렇고...허그, 아니 백허그 정도면 어떨까?"

 "저를 백허그 한 채로 그대로 링 위에 머리부터 꽂아넣을 생각이신가요, 선배?"

 "그런 레슬링 기술 할 줄 모른다고!"

 "근데 오빠 그거 아세요? 뒤에서 껴안으면 만지게 될지도 모른다고요? 배라던가, 가슴이라던가."

 "아니,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걱정 마세요. 오빠가 죽어 시신이 되면, 제가 곁에 누워서 껴안고 이것저것 해드릴 테니까요. 물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요."

 "아하하, 너 망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

 "여자아일 달아오르게 한 오빠 잘못이에요."

 "미안하지만 그건 네 오해야, 진짜로."


 다시 불길이 쏟아져내리는 통에 서둘러 몸을 피했다. 협상은 결렬되었다는 걸까.


 "선배! 제가 여자로서 매력이 그렇게 없는 건가요?"

 "그렇다기보단, 서로 이성적으로 잘 생각해보자는 거지."

 "이성적으로요?"

 "솔직히 말해, 넌 지금 이 상황이 제정상인거 같니?"

 "어떤 점에서요!"

 "지금 네 모습을 보면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느냔 말야."


 선예는 잠시 자기 모습을 이리저리 둘러 보았다. 발끝과 손끝, 두 어째 위에 작은 불꽃이 도깨비불인 양 떠 있는 것을 보았고, 또 그 자신이 허공에 아무 지지 없이 떠 있단 것도 직접 보았다. 좋아, 이제 말이 좀 통할지도 모른다.


 "...딱히 이상한 구석은 없는데요? 아, 역시 옷을 갈아입어야 했을까요?"

 "그런 얘긴 아닌데."

 "괜찮아요. 어차피 전부 벗을 건데요, 뭐."

 "어쨌든 벗는다는 이야기로 진행시키지 마! 위험하다고! 심의라던가, 연령층이라던가, 운영자의 철퇴라던가!"

 "물론 그 전에 오빠를 꼼짝 못하게 만들고 나서지만요."

 "내가 죽는다는 걸 전제하는 것도 그만둬!"


 대답 대신 불길이 내가 있던 방향으로 쏟아졌다. 간신히 몸을 피했지만, 대신 등 뒤에 있던 찬장이 내용물째로 산산조각났다. 아,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던 그릇들이 전부 사금파리로 변해간다...

 선예의 일방적 공격을 피해 도망치다보니 어느새 거실을 나와 부엌에 있었다. 다른 방엔 차마 들어갈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몰려온 게 거기였지만, 식탁이나 냄장고, 수납장 등으로 이미 꽉 차 비좁은 공간에서 도망쳐다니기엔 내 쪽이 확실히 불리했다.

 그럼에도 내가 부엌으로 간 건 이유가 있었다. 부엌엔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후문이 있다. 어떻게든 거기로 나가면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히지 않아도 될 테다.

 하지만 기껏 도착한 문 앞에서, 나는 자물쇠를 푸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이제 슬슬 단념하시는 게 어때요, 오빠?"


 식탁 위에 올라서 나를 내려다보며 선예는 그렇게 말했다. 손아귀엔 이글대며 타오르는 검은 불꽃 뭉치가 들려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나는 자물쇠에서 손을 떼고, 꼴사납게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내 모습을 본 선예는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진작 그렇게 포기하셨으면 좋았을 걸."

 "아, 아냐! 이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서..."


 주위를 완전히 압도하는 분위기를 풍기며, 선예는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이제 더는 도망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난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등을 기대고 있던 후문이 밖에서 홱 당겨졌다. 의지할 것이 없어진 내 몸은 그대로 뒤로 넘어져 바닥에 누웠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는 머리맡을 올려다보았다. 낯익은 꼬마애가 거기에 있었다. 잿빛 금발에 반팔, 반바지 차림을 한 개구쟁이 여자아이 모습으로, 여신은 나를 한심하단 듯 쳐다보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난리 부르스를 춰 대도 이웃 사람들은커녕 부모님들도 한 분 나와보시지 않다니. 넌 그거냐? 소설이나 만화 속 주인공이라도 되는 거냐?"

 "이그드라실!"

 "네 말이 맞다. 네가 없으면 곤란한 건 나다. 믿어줄 사람이 없으면 여신은 존재하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까, 하고 여신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고사리처럼 작고 부드러운 살이 통통하게 오른 어린아이의 손이다.


 "그러니까 도와주러 왔다. 나의 신도여."

 "신도는 아니지만 덕분에 살았어. 잘 부탁해."

 "무슨 소리냐? 너는 베드로다. 네가 내 믿음의 반석이 아니더냐?"


 씩 웃으며 그 손을 붙잡자, 여신 또한 내민 손을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간신히 내가 몸을 일으키자 여신은 내 손을 놓고 선예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내 신도여,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있는 거 같은데?"

 "그렇지. 선예도 그렇지만 이것저것, 부모님이 보시면 뒷목 잡고 졸도하실 일이 한두 개가 아니거든."

 "후후, 구원해 줄까?"

 "응, 부탁할께. 멋대로 부려 주라고. 내 몸이건 뭐건."

 "물론이지. 위기에 빠진 신도를 구원하는 건 여신이 할 일 아니냐."


 확신에 찬 목소리로 여신은 말했다. 그녀 곁에 서서 나는 선예를 보았다. 어째선지 선예는 여신 앞에서 조금 쭈뼛대는 것처럼 보였다. 어린아이처럼 보여도 역시 신은 신인 걸까?

 두 손을 자기 허리에 올려 붙잡은 채 여신은 선언했다.


 "이제 반격할 차례다!"


=================================================

 다시 가볍게, 정신나간 분위기로 돌아왔습니다. 오히려 첫 화보다 쓸 때 느낌은 더 좋습니다.
 오늘은 텐션이 받는 날이네요 ㅎ
 평소에도 이렇게 글이 나오면 좋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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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클레어^^ 2012.05.11 08:02
    이그드라실이 구해주러 왔군요!
    이그드라실, 제발 죽이지만은 말아줘~!
  • profile
    윤주[尹主] 2012.05.11 08:08
    좋은 반응 감사합니다 ㅎ
    담 화에 참고할게요^^;
  • ?
    乾天HaNeuL 2012.05.11 23:18
    오타지적. ~~하든가, 라든가~ '던가'는 과거형일 때 쓰고, 여기선 '든가'가 맞을 거에요.

    그리고 운영자의 철퇴는 매섭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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