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09 17:49

이그드라실! 15화

조회 수 515 추천 수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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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1때 얘기다.

 공부를 잘하는 애들 가운데도, 소위 질 나쁜 애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애들에게서 나는 잠시 동안이나마 괴롭힘당한 적이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동기를 제공한 게 나 자신일 것이다, 란 합리적인 추측만 있을 뿐이었다. 짜증은 났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앉아 있는 걸 발끝으로 툭툭 건드려대는 정도였으니까.

 아마 우유급식비를 거둘 때였을 것이다. 학급 총무로서 내가 반 친구들로부터 돈을 받아 정리하는 일을 했었다. 보통 가져온 사람들이 한 번에 몰려 내놓기 때문에, 1교시 시작 전엔 항상 급식비를 빨리 내버리려는 애들로 북적였다. 혼자 여럿을 상대하다보니 아무래도 정신이 없어진다.

 돈을 받고 명단을 기록하다가, 문득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벽 한 곳에서, 손 하나가 슬슬 기어나와 책상 위로 올라왔다.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 손은 책상 위를 더듬거리더니 검정 볼펜 하나를 집어들고 다시 사라져버렸다. 어설픈 그 솜씨 탓에, 나는 범인이 누군지 얼굴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어쩌면 빌려간 걸지도 모른다. 평소 사이는 별로 안좋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만 하루가 지나도록 볼펜은 돌아오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 녀석이 자리를 비운 사이, 녀석 책상 위에 그가 가져간 내 볼펜이 팽개쳐 있는 걸 본 적도 있었다. 나는 그걸 도로 가져오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일종의 빚을 지운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저 단순히 문제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였던 건지도 모른다. 어찌됐건 나는 그런 녀석과 관계되고 싶지 않아 했고, 철저히 무시해 버렸다. 결과적으론 괴롭힘은 사라졌고, 학년이 올라 인문계 반과 이공계 반으로 나뉘게 되자 녀석과도 영영 만날 일 없게 되어 버렸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인간은 바뀌고, 관계도 매번 달라진다. 절대 불변하는 건 있을 수 없다. 만약 무언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그건 지루할 뿐이고,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울 뿐일 거다. 녀석은 그걸 내게 증명해 보였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기에,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기로 결심했다. 누구의 말도 한때는 진리였다가, 시간이 지나면 진리가 아닌 것이 될 수 있다. 상황이 바뀌면 친구도 적이 되고, 적도 친구가 된다. 순진하게 지금 이 상황이 변하지 않을 거라 믿다간 언젠가 뒷통수를 얻어 맞기 십상이다.

 아무것도 믿지 않고, 확신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되어갔다. 어차피 고등학교에 오고부턴 학교 - 학원 - 집의 연속이라 누군가와 제대로 관계할 시간도 없었다.

 이런 내가 여신을 믿어 준단 것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했던 건지도 모른다.






 낯선 남자와 나눈 얘기를 듣고도, 여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외였다. 자기 정체를 내게 확신시키려고 온갖 변명을 다 끄집어낼 줄 알았다. 그 남자 말은 다 거짓말이다, 그런 사람은 알지도 못한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여신이 보인 반응은 달랐다. 남자에 대해 말했을 때, 여신은 깜짝 놀란 양 눈을 동그랗게 떴고, 이내 쓸쓸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녀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옛 추억이라도 떠올리는 걸까? 남자를 원망이라도 하는 걸까? 아니, 원망이라기보단 그리워한다는 게 더 가깝다. 여신은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쩐지 기분이 불편해졌다. 여신이 낯선 남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단 사실에 나는 답답해했고 짜증이 났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여태껏 어느 누구와도 느껴본 적 없는 그런 감정이었다.


 "아무 변명도 하지 않는거야?"


 그래서 괜히 여신에게 딴소리를 했다. 조금이라도 낯선 남자에게서 그녀 관심을 돌려놓고 싶었다. 여신은 잠깐 나를 쳐다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변명은 하지 않는다. 내가 뭐라건, 넌 믿고 싶은 걸 믿을 테고 그렇지 않는 건 믿지 않을 테니 말이다."

 "뭐야, 그게. 내가 믿던 믿지 않던 상관 없단 거야?"

 "지금껏 결정을 내린 건 네가 아니더냐? 내가 무슨 소릴 하건, 또 남들이 뭐라고 말하건 말이다."


 정곡을 찔렀기에 나는 잠시 동안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다시 여신은 무언가 생각에 몰두했다. 그녀 관심을 돌리기 위해, 나는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네가 믿어 달라고 간청해야 하는 상황 같은데? 내가 믿어주기 때문에 네가 여기 있는 거라며."

 "불쾌한 남자다. 그럼 내가 사라지면, 네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거냐? 그 선예인가 하는 여자를 구한다고 하지 않았더냐? 지금 가장 매달리고 아쉬워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오히려 네가 아니더냐?"

 "상관없어! 그런 앤, 굳이 도와주지 않아도..."


 말끝을 흐린 건 여신이, 여태껏 보이지 않았던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여신은 화를 내고 있었다. 어째서 그녀가 화를 내는지는 잘 알기에, 나는 잠자코 어떤 책망이든 들을 각오를 했다.

 여신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넌, 내가 본 가운데 최악인 남자다."

 "..."

 "너 같은 남자가 날 불러냈단 게 믿어지질 않아. 뭔가 실수가 있었던 거겠지. 미안했다. 귀찮은 일 억지로 떠맡기려 해서. 어차피 네녀석은 내 말에 그리 진지하게 신경써본 적도 없었겠지만."

 "..."

 "한 마디쯤 해볼 생각도 없느냐? 한심한 자다. 네가 원하던 대로 사라져 주마. 세계가 오늘 내일 멸망한다? 네겐 아무 상관없는 일이겠지. 다른 사람을 알아보러 가겠다. 잘 있거라. 이제 영영 만날 일 없을 테니까, 그쯤은 말해 주마."


 여신이 등을 돌려 방을 나설 때까지도 나는 얼어붙은 듯 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가기 전, 언뜻 내 모습을 본 여신은 짧게 혀를 차며 문을 닫았다. '바보같은 놈!' 문을 닫으며 여신이 하는 말이 방 안까지 들렸다.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그저 여신이 관심을 보여 주길 바랐을 뿐인데, 왜 일이 이렇게 꼬인 걸까? 애당초 난 왜 여신에게 관심을 바란 걸까?


 "세상이 멸망한다면, 그건 사랑 때문일 거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별안간 창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두컴컴한 새벽 허공에 아는 사람이 떠올라 있었다. 풀어내린 단발 머리. 핑크빛 티 위에 청조끼, 거기에 아슬아슬하게 짧은 청치마 차림.


 "선예 너!"

 "후후, 겨우 단 둘이 남았네요. 오빠. 아니면 혹시, 선배라고 부르는 게 더 좋으세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지금이라도 괜찮으니까, 선생님께 가서 싹싹 빌기라도 해!"

 "왜죠? 저랑 오빠 사이를 방해한 사람에게 벌을 준 것 뿐인데."

 "몰라서 물어? 경찰들까지 널 찾고 있단 말야! 잡히면 꾸중만 듣고 끝날 일이 아냐. 어쩌면!"

 "절 걱정해주시는 거군요? 기뻐요."


 선예 몸 주위로 검은 불길이 치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그녀를 마주보고 섰다. 어쩐지 위험하단 예감이 들었다.


 "저요, 억지로라도 선배가 갖고 싶어졌어요."

 "그만 둬. 넌 원래 이런 애 아니었잖아!"

 "그럼 키스해 주실래요?"

 "이 상황에서 누가 그런 걸 할 수 있겠냐!"

 "할 수 없죠. 그냥 억지로라도 할 수밖에."

 "미안한데, 난 절대 지금 너랑 할 생각 없어."

 "그럼 시체에라도 입을 맞출 거에요. 다 타버려 재가 된 몸에 입을 맞추죠. 잘린 목에 입을 맞추죠. 질식해 새파랗게 변해 버린 입술에 입을 맞추죠. 물에 빠져 퉁퉁 분 입에 제 입을 맞추죠."

 "넌 제정신이 아냐."

 "저도 알고 있어요. 사랑은 병이라고들 하니까요."


 그리고 시커먼 불길이 창문을 깨고 들어와 그대로 나를 덮쳤다.


================================================

 얼마전 예상대로라면 이번 화가 완결이었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몇 화 정도가 더 남았네요;
 예상이란 건 항상 잘 빗나갑니다. 지금도 앞으로 약 3, 4화 진행하면 완결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지만 의외로 20화 넘게 진행될지도 모르죠;
 분량이 예상보다 늘어난 게, 혹 쓸데없는 게 너무 들어가 글을 지루하게 만들고 있진 않나 걱정이 듭니다.

 아무튼 다음 화가 결전 파트입니다. 한 화로 끝낼 수 있을지, 아니면 두 화는 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말이죠.
 내일 뵙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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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레어^^ 2012.05.11 07:59
    헉... 점점 사태가 심각해지네요.
    이그드라실은 바이바이 하고...;; 이제 주인공 혼자서 뭘 해야 할지...
  • profile
    윤주[尹主] 2012.05.11 08:04
    방금 읽으셨네요 ㅎ
    아마 지금쯤 다른 화도 이미 보셨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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