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07 21:32

이그드라실! 13화

조회 수 527 추천 수 0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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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이 우리 학교에 온 건 개교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들 쑥덕거렸다. 당사자로서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된 수학 선생님을 제외하고, 3학년 담임들은 모두 학년실에 모여서 학년주임 중심으로 긴급 회의에 들어갔다. 애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전날 사건에 대해 속닥였다.


 "전기 충격기였다며? 수학쌤."

 "어. 기절한 것뿐이고 특별히 심하게 다친 곳은 없다더라."

 "누가 그랬대?"

 "여자애라던데? 왜, 그 우리반에 온 애."

 "아, 그 귀여운 애...그래서? 걔는 어떻게 된 거야?"

 "수학쌤 발견해서 신고했을 때,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대."

 "당연하지! 거기 있으면 경찰한테 잡혔을 텐데." 

 "수위 아저씨 징계 먹는다던데?"

 "진짜? 와, 여러 사람 피보네. 미친 년 하나 때문에."


 아이들이 이러니 저러니 떠들어댈 때, 나는 조금도 거기에 끼어들 수 없었다. 사건의 당사자로서, 또 선예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 죄책감을 감출 수 없어서였다.

 경찰은 어제 일을 치정이 얽힌 사건으로 생각했다. 치정. 이성을 잃은 남녀 간의 애정. 경찰은 선예가 나를 사랑해서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그날 선예 행동을 본 반 애들에게서 얻은 증언이 근거가 되었다. 평소 가족간에 왕래가 있었다는 이웃들과 부모님의 증언 또한 참고가 되었다. 물론 양 쪽 부모님 모두 우리가 사귀고 있었던 줄은 몰랐다고 답했지만.

 당연하다. 선예와 나는 실제로 사귀고 있지 않았으니까.

 선예와의 관계에 대해 나는 부인했고, 윤겸도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경찰은 금새 물적 증거를 찾아내 우리에게 보였다. 선예가 그 날 들고 왔던 과일 담긴 용기가 그것이었다.


 "이렇게 많이 준비해 오려면 꽤 정성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너흰 그냥 서로 잘 아는 이웃 사이라고 했지? 그냥 평범하게 잘 아는 이웃끼리 보통은 이렇게까지 해줄까?"


 형사의 질문에 나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오히려 나 스스로가 혼란스러워졌다. 정말 선예는 나를 좋아하고 있었나? 내가 눈치채지 못하던 것뿐인가?

 선예가 수학 선생님을 전기 충격기로 기절시키고 달아난 사건은 이제 동네 주민들에게, 가십 좋아하는 기자들에게 그 소식이 전해져 오르내렸다. 사건이 일어난지는 겨우 하룻밤이 지났을 뿐이지만, 벌써 조간 신문 한켠엔 선예 사건에 대한 기사가 작게나마 실려 있었다. 모 유력 인사의 뒤늦은 대선 출마 결정 소식만 아니었더라도 신문 1면에 실렸을 기사라고들 떠들어댔다. 윤겸은 딱히 그것이 아니더라도 1면에 실릴 만한 기사는 아니었다고 내게 말했다. 하지만 한 신문에서는, 일 면 전체를 광고로 도배한 뒤 그 다음 면에 교권 붕괴 특집 기사를 실었다. 거기에 선예 사건이 실려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결국 나는 그 어떤 것도 믿지 않기로 했다. 아니, 믿지 못하게 되었다. 온갖 뜬소문과 각계 각층 사람들의 섣부른 추측들, 심지어 당사자로서 내가 보고 들었다고 생각한 그 모든 것들까지도 어느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작은 거짓말쟁이 '여신'이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적이 이전까진 없었다. 아무것도 믿지 못하게 된 지금, 그나마 믿을만한 것은 내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들은 여신의 존재뿐이었다.






 자리에 앉아만 있어도 지난 2, 3일 사이 겪었던 일들이 하나씩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여신의 등장, 세계수에 대한 꿈, 여신이 가짜라고 주장한 낯선 남자, 그리고 선예의 일까지. 눈을 감아도, 귀를 틀이막아도 각인된 인상은 끊임없이 내 속에서 반복해 재현되었다. 공부에 제대로 집중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9월 모의고사까진 불과 한 달 가량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조퇴를 하고 학원도 쉬었다. 금요일이었으니까, 주말까지 3일간은 마음을 추스를 여유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식으로 쉬어본 적은 중학교 이래 처음인 듯했다.

 집에 도착한 건 점심이 조금 넘어서였다. 이 시간 집에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초인종은 눌러 보지도 않고 나는 곧바로 열쇠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이제 좀 내 말이 믿어지나 보지?"


 창백한 잿빛 금발, 투명해서 붉게 상기된 듯 보이는 뺨, 개구장이 아이처럼 장난기 가득한 두 눈까지. 가슴팍에 겨우 닿을까 싶은 그 작고 건방진 꼬마애를 나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그드라실, 신화 속 세계수의 이름을 가진 여신은 저보다 훨씬 큰 나를 올려다보면서도 전혀 두려움 없이 당당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순간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올랐다.


 "너! 대체 지금껏 어디서 뭘 했던 거야! 묻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는지 알기나 해?"

 "그렇게 성질내지 마라. 내가 나타나지 못했던 건, 절반 정도 네 탓도 있으니 말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생각해봐라. 넌 나에 대해 아무 것도 믿지 않았지 않느냐?"


 믿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신이 한 얘기는 조금이나마 상식적인 면도, 논리적인 구석도 없었으니까.

 항변하려던 내 말을 가로막으며, 여신은 말했다.


 "여신은 믿음을 기반으로 존재한다. 거꾸로 말하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느냐 마느냐 하는 건,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네 믿음에 달린 문제다 이거지."

 "난 네 말따위 믿지 않아."

 "그러냐, 그러냐. 하지만 이걸 봐라. 난 분명 여기 이렇게 존재하질 않느냐?"


  네가 믿기 때문에 난 여기에 있다. 뼈아픈 말은 일부러 감춰두고서 여신은 킥킥 기분나쁘게 웃더니, 다시 내게 물었다.


 "아니면 뭐냐? 내게 의존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


 모든 것을 이미 다 아는 듯 보이는 여신의 태도에, 나는 순순히 선예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얘기를 들려줄 수밖에 없었다.

 거실에 들어와 앉은 채, 여신은 내 얘기를 유심히 들었다.


 "그건 역시, 그 불꽃 때문인거지?"

 "수트르의 불 얘긴가?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하면서 여신은 말을 덧붙였다.


 "착각해선 안 된다. 넌 그 불씨가 선예라는 여자를 이상하게 만들었다고 애써 믿고 싶은 모양이다만, 애당초 불씨란 인간에게서 나온 것. 선예라는 여자가 가진 불씨가 우연히 밖으로 번져버렸다. 이것이 진실이다. 너는 그걸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그건..."

 "인간은 자신이 추악하단 걸 알지 못한다. 알아도 말하지 않는다. 알아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알아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인정하지 않아서 인간은 괴로워한다. 속으로 앓는다. 불씨를 키운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먼저 자신이 추악하단 걸 인정하는 거다. 그 뒤로 무엇을 하건, 일단 그게 가장 우선이 되야 하느니라. 자기 불씨를 번져 나오게 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

 "하지만 네가 그걸 인정하지 못해도 상관은 없지."


 여신이 하는 말은 잘 이해되질 않았다. 인정해야 한다고 해놓고 인정하지 말라니.

 여신은 말을 계속해 나갔다.


 "네가 엄청난 고집쟁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뭐라고?"

 "넌 네 상식을 애써 지키고 경거망동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 결과가 무어냐? 철저히 혼자가 된 게 아니냐."

 "아니야!"

 "일단 진정해라. 그게 나쁘단 게 아니니까. 덕분에 지금 네 안에 있는 불씨는 폭발 직전이 되었다. 재밌는 건, 네가 의외로 그걸 잘 통제하고 있단 거지."


 그게 무슨 뜻이냐고 여신에게 물었다.


 "쉽게 말해, 맞불을 놓는 거다."


 여신은 우선 짤막하게 계획을 요약했다.


 "그 여자애가 불꽃을 가지고 사람들을 위협한다면, 네 불로 맞불을 놓아 그 여자애 불꽃을 압도해 버리면 그만이다. 불씨가 사그라들면, 그 여자애도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오겠지."

 "하지만 난 그 불이란 걸 다룰 줄 모른다고!"

 "걱정마라. 내가 다 도와줄 테니. 불을 지피는 것도, 번지게 하는 것도, 도로 가라앉히는 것도 다 내가 도와줄 테니 염려할 것은 없다. 넌 그저 필요한 시간, 필요한 장소에 필요한 상황에 맞춰 있기만 하면 그만이니라."

 "어쩐지 죄다 뜬구름같은 얘기뿐이네."

 "그래도 믿어라. 네가 믿어주는 건 내겐 힘이 되니까 말이다."


 말을 마친 여신은 개구쟁이처럼 씩 웃었다. 그 웃음을 보니 마음 속에 남았던 막연한 불안감이 조금은 해소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내가 여신에게 물어볼 것은 또 있었다. 선예에 대해 얘기하면서, 나는 일부러 그것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 것이냐?"


 여신을 눈 앞에 두고, 나는 잠깐 그 낯선 남자에 대해 얘기를 할지 말지 고민했다. 낯선 남자에 대해 얘기하면, 여신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정체에 대해 밝혀야 할 것이다. 만약 여신이 정체를 밝히게 되면 어떻게 될까? 난 그녀를 전보다 더 믿을 수 있게 될까? 아니면 더 믿지 못하게 될까? 그녀가 정말 내 믿음 때문에 존재한다면, 내가 그녀를 믿지 못했을 때 여신은 어떻게 되어 버리는 걸까? 여신 없이 나는 선예를 구할 수 있는 걸까?


 "뭐든 물어라, 특별히 허락해주마."


 여신이 재촉하는 말을 건넸다. 나는 조금 더 망설인 끝에 결심을 하곤 여신에게 물었다.


 "대체 그 말투 뭐야? 이상하잖아."


 스스로 생각해도 용기 없는 결정이다 싶었다.

 질문을 들은 여신은 깔깔대며 웃었다.


 "하하하, 이거 말이냐? TV에서 본 사극 흉내를 내는 거지."

 "이상하니까 그만 둬. 진심이야."

 "후후, 하지만 그러는 너도 말투가 조금 변하지 않았느냐?"


 내 말투가 변했다고?


 "전에는 내게도 깍듯이 존댓말을 썼던 거 같은데, 조금은 거리감이 준 것이냐?"

 사실은 무엇이냐, 라고 장난스럽게 묻는 여신 앞에서 나는 대답 없이 억지로 웃어 보이기만 했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여신 앞에서, 차마 그녀가 가짜라고 말할 용기도 없으면서도 나는 심지어 그녀와 감정을 약간 나누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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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화는 쓰는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카스 님께서 이 글을 보실지는 모르겠지만, 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지난번 올리신 댓글에 대해 오해 있었던 점 사과드립니다.

 그와는 별개 얘기입니다만, 글은 작가와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 속에 작가의 현재 심경과 정서 따위가 묻어져 나온다고 생각해, 음울한 분위기 글을 읽으며 작가를 동정한다면 그건 독자가 지나치게 순수한 것뿐일 것입니다. 작가란, 때론 글을 위해서 자기가 믿지도 않는 것을 믿는 것처럼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말이죠.
 제가 쓰는 글 속에 제 자신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저는 항상 저와 작중 등장인물 사이에 거리감을 유지하도록 해왔습니다. 등장인물이 저와 반대되는 생각을 말하고,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럼에도 제 여러 글 속 등장인물들 사이에 엿보이는 유사성 같은 게 있다면, 그건 제 경험 부족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 경험 외의 소재를 다루는 건 아무래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이그드라실의 이야기는 앞으로 기껏해야 5화 이내에 완결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글을 쓰는 게 오랜만이긴 하지만 스스로는 제법 즐기면서 쓰고 있습니다. 개인적 사정과는 상관없이 말이죠 ㅎ
 연재글 조회수의 추세는 리뉴얼 전 제가 체감하던 추세와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문학동이 개편으로 축소 운영되는 와중에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싶네요. 아무쪼록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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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늘 2012.05.08 04:54
    13화까지 잘 보았습니다~! 어떻게 불을 잡을지 궁금하네요
  • profile
    윤주[尹主] 2012.05.08 06:01
    감사합니다 ㅎ 올려주신 글 재밌게 봤어요. 조만간 또 좋은 글 써서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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