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05 19:22

이그드라실!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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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일이 있은 이래 여신은 이틀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역시 그날 일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던 거라고, 뒤늦게 홀로 납득을 했다. 꿈이었다면, 여신이 굳이 모습을 감추어야 할 만한 이유가 딱히 없을 테니까.

 아니면 또다른 이유라도 있는 걸까?

 점심시간, 윤겸과 교문을 나섰다. 방학 기간 중 급식소를 운영하지 않는 탓에, 도시락을 싸 오거나 교문 밖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불합리하다면 불합리하지만, 어차피 학원이나 독서실을 다녀도 밖에서 식사를 해야 하긴 마찬가지일 거다.

 학교 맞은편 한 분식집에서 대충 밥을 먹고 나오는 길이었다. 교문 앞에서 웬 낯선 남자가 수위실 안을 물끄러미 넘겨다보는 게 눈에 띄었다.


 "뭐지? 바바리맨인가?"

 "애들 불러올까?"

 "뭐하게?"

 "둘러싸서 망신살 한 번 제대로 주게."

 "아니, 진짜 바바리맨일리 있냐. 우리 학교 남고고..."

 "...여보세요. 야, 지금 교문 앞에,"

 "진짜로 불러 모으지 마!"


 부랴부랴 윤겸을 말리느라 옥신각신 하는 통에, 교문 앞에 있던 남자 눈에 띈 모양이다. 낯선 남자는 우리를 보더니, 갑자기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 너희들 여기 학생들이지? 이 방학중에 온 거 보니까 3학년?"

 "네, 맞는데요."


 엉겁결에 대답하면서 우리는 남자 눈치를 살폈다. 키는 170 가량에 몸은 마른 편이라, 남자의 체구는 볼품없이 작았다. 친절해 보이려고 억지로 웃고 있지만, 눈매가 쳐져 있어 마치 인상을 찡그리고 있거나 혹은 우는 것처럼도 보였다. 몇 년째 고시 공부를 한다는 동네 형이 항상 그런 식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다녔다. 낯선 남자도 그 형보다 결코 나이가 많아 보이진 않았다.


 "올해는 초록색이 3학년이구나. 우리 때 명찰이 노란색이었거든."

 "우리 학교 졸업하셨어요?"


 윤겸이 묻자, 낯선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선고 명찰은 연 단위로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이 번갈아 쓰였다. 우리가 1학년이었을 땐 3학년이 빨간색 명찰이었고, 2학년이 노란색 명찰이었던 것처럼. 앞에 있는 남자는 우리보다 4년 내지 7년 정도 전에 졸업한 선배인 모양이었다.


 "졸업할 때랑 변한 게 없네, 이 학교는. 요즘도 유도해? 체육 시간에."

 "작년에 몇 번인가 했어요. 3학년 되니까 체육 시간에도 자습하거나 애들이랑 축구하고 놀기만 하지만요."

 "아, 그래. 그랬던 거 같네. 어디 보자, 본관도 옛날 그대로고, 그 나무도..."


 거기서 남자는 말끝을 흐렸다. 무언가를 얘기한 것같긴 한데, 혼잣말이었는지 나나 윤겸에겐 전혀 들리지 않았다.

 조금 뒤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너희, 아직도 그 소문 알려나?"

 "소문요?"

 "모를까...저기 본관 앞에 큰 나무 있지? 거기 주위를 100바퀴, 남에게 안 들키고 돌면,"

 "수능때 만점 맞는다는 얘기요? 그거 요즘도 있어요."


 전나무 얘기가 나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자칭 여신이라는 꼬맹이가 생각난 탓이다. 남자는 윤겸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라, 내 반응은 전혀 알지 못한 눈치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적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었다.


 "얼마 전에도 그거 해본답시고 매일 학교 나와서 빙글빙글 돌다 간 애가 있었다니까요."

 "야!"

 "왜, 난 너라고 안 했는데?"


 윤겸이 한 말에 지레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과잉 반응을 해버렸다. 남자는 이제 윤겸이 아니라 내 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이걸 노린 게 분명하다. 윤겸이라면, 이 상황을 꾸며내고도 남는 녀석이다.


 "그렇구나, 네가..."


 남자의 거북한 시선에 나는 자연스레 눈을 피했다. 그는 조금 뜸을 들인 뒤, 약간은 망설이는 기색으로 내게 물었다.


 "혹시 그럼, 여신에 대해서도 아니? 이만한 키에, 백금발이랄까, 약간 금빛 도는 머리 색인."


 두말할 것도 없이, 남자의 말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묘사하는 건 정확히 이그드라실 여신의 모습이었다.






 "시간, 아직 괜찮지?"


 윤겸을 먼저 보낸 뒤, 남자는 나를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교문을 오가는 애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남자는 내게 음료수를 건네며 물었다.


 "걔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잘은 몰라요. 자기가 여신이라고 하고, 그건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암튼 걔 옆에 있으면 이상한 일들이 생기고..."

 "마법이라도 부리는 거 같겠지? 나도 잘 알아."


 남자가 먼저 음료수 캔을 따서 입에 가져다 댔다. 반면 나는 캔을 따길 조금 망설이고 있었다.


 "그거 마셔도 돼."

 "괜찮아요. 저 탄산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그러니? 그럼 다른 걸로 바꿔올까?"

 "나중에 친구나 주려고요."


 잔뜩 흔들어서 윤겸이 녀석에게나 던져줄 생각이다.


 "그래. 그럼 얘기는 계속 해도 되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남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여신이라, 걔가 그렇게 말했어?"

 "정확히 말하자면 이그드라실이라고, 그렇게 말했어요. 꿈에서도 그 애를 봤어요. 커다란 나무 같은 게 있었고, 뱀들이 나오고."

 "북유럽 신화네. 너도 들어본 적은 있지?"

 "네."


 여신이 얘기를 했을 때, 예전에 읽어둔 게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세계수라던지, 그것을 수호하는 뱀이라던지 하는 것들. 비록 신화 그대로는 아니었지만, 신화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음직한 그런 환상들.

 남자는 여기서 살짝 비웃음을 흘렸다.


 "그럼 너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겠네. 걔 하는 얘기가 거짓말이란 것 정도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다만 남자가 신화 얘기를 꺼낼 때부터 조금은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을 해두고 있었다. 애당초 그녀가 여신이라는 말 따위 믿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남자는 제 목을 살짝 축였다.


 "...그 녀석은 내가 만들어냈어."

 "네?"

 "믿기진 않겠지. 하지만 사실이야."

 "..."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 이런 말쯤은 들어봤겠지?"

 "네."

 "처음엔 나도 별 기대는 하지 않았어. 그저 매일 학교에서, 학원에서 문제집만 붙잡고 하루 종일 앉아 있으려니까 스트레스가 쌓이더라고. 그걸 어떻게든 풀려고, 저녁때마다 산책겸 건물 주위를 돌곤 했었어."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나도 그때의 남자와 비슷한 상황이니까.


 "그때 뭐랄까, 중2병이라면 중2병이지. 그런 게 좀 있어서 말야. 진짜 뭔가 내가 제대로 빌기만 하면 이루어질 줄 알았어. 처음엔 가볍게 산책하는 것처럼 돌았던 게, 나중엔 마치 탑돌이하듯, 뭔가 빌면서 돌게 되더라? '이번 중간고사 잘 보게 해주세요.'라거나, '수능 때 점수가 팍 오르게 해주세요'같은 거. 하하, 나중엔 세계 평화라던가 웃지 못할 것들도 잔뜩 빌었지만."


 남자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이 났다. 여신을 만나기까지, 매일 밤마다 그 큰 전나무 주위를 돌면서 무언가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던 기억이 말이다. 별로 기대 따윈 하지 않았다, 라고 한다면 거짓말이 될 거다. 뭔가 기대를 하지 않았더라면 100일씩이나 미친 척 한밤중 교정 안을 맴돌지는 않을 테니까.


 "그때쯤 신수 얘기를 들었어. 커다란 나무가 자주 신성시되어 성황당같은 것도 세워지고, 무당이 제도 올리고 했었다잖아? 어쩌면, 오래된 나무엔 정말 특별한 힘이 있는게 아닐까? 뭐 그런 기대를 했던 거 같아."


 그리고 남자는 본관 앞에 상징처럼 심어진 히말라야전나무를 골라 그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처음엔 학교에 남아 있는 전설 따위를 찾아보려 했단다. 남학교다 보니, 교정에 남은 낭만적인 전설 따위는 찾기 힘들었다. 기껏해야 학교 뒷편 어디어디가 예전에 무덤이었다느니, 운동장 한쪽 구석에서 누군가 죽었다느니 하는 흉흉한 얘기뿐이었다. 그렇다면 아예 전설을 내가 만들어버리자, 라고 남자는 생각했단다.


 "학교 홈페이지며 인터넷 사이트 몇 곳에 서로 다른 아이디로 지어낸 이야기를 올렸어. 별로 주목은 못 받았지만 상관은 없었지. 학교에 가면, '어떤어떤 사이트에 보니까 이런 이런 소문이 있더라. 근데 그게 우리 학교라더라.' 하는 얘기를 퍼트렸어. 소문이란 게 그렇잖아? 반신반의하면서도 남한테 얘기하게 되고, 자꾸 퍼지다보면 처음 얘기를 꺼낸 건 누구인지도 모르게 되버려. 한 달쯤 지났나? 평소처럼 밤 산책을 나섰다가 누군가 그 나무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게 보였어."

 "지금 얘기가, 그 여신이란 애랑 무슨 상관이죠?"


 남자 말이 길어지면서 나는 조금 초조해졌다. 점심 시간이 끝나기 전 교실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자기 시계를 흘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괜찮잖아? 아직 10분 이상 남았는데."

 "저기, 웬만하면 짧게 얘기해주시겠어요?"

 "슬슬 끝나가니까 걱정하지 마. 암튼 하던 얘기 말인데, 애들이 점점 믿기 시작했다란 것까진 말했지?"


 반억지로 이야기 진행이 이어졌지만, 반발하지 않았다. 여기서 더 딴지를 걸고 넘어졌다간 이야기가 더 길어질 수 있었다.


 "나도 그 소문이 얼마나 많이 퍼졌는지 몰라. 또 얼마나 애들이 많이 믿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수능이 얼마 안 남아서부턴, 의지할 때 없이 스트레스만 잔뜩 쌓인 애들이 사실이 분명치 않은 뜬소문에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많이들 의존했던 걸지도 모르지. 암튼 그런 식으로, 며칠이 지나다가 갑자기 생겨난거야. 그 여신이란 게."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이 여신을 만들어냈다. 혹은, 여러 간절한 소망이 모여 여신이 탄생했다. 어느 쪽이건, 여신이라는 그 녀석이 자기 말처럼 본래부터 존재해온 무언가는 아니었다. 이 사실만은 확실해졌다.

 그러나 나는 남자가 한 말에도 의심을 품었다. 여신이 한 말은 사실이 아니었고, 그건 나도 기대하던 결과였다. 그렇다고 남자가 한 말을 덥석 믿을 수 있을까? 단순히 나와 의견이 같다고 그가 옳은 것은 아니다. 나와 그가 틀리고 여신이 옳은 걸지도 모르지 않는가.

 만의 하나라지만, 본래 존재해온 여신이 이 남자가 꾸며낸 소문에 의해 억지로 끌려 나온 걸수도 있다. 그러면 여신이 한 말도 완전히 거짓은 아니게 된다.


 "넌 내 말을 다 믿는 게 아니구나?"


 남자는 내 눈치를 보더니 마음을 읽어낸 듯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떤 부정도, 긍정도 남자에게 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물었다.


 "한 가지 빠트리신 얘기가 있어요. 그 얘긴 뭐죠? 세계가 멸망한다느니 하는 거요."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어디서 종말론이라도 주어들은 게 아냐? 2012년이잖아. 뭐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해인걸."


 남자와 나눈 대화는 그것이 끝이었다.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며 남자는 나를 보내 주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불쌍한 애니까, 적당히 호응은 해 줘. 그래도 너무 믿지는 마. 걔 말 믿고서 네가 이상한 짓이라도 저지르면, 선배로서 책임감을 느끼게 되니까."

 "멋대로시네요. 책임감을 느끼고 싶지 않으니 사고는 치지 말라니."


 짜증이 나서, 괜한 허세를 부리고 말았다. 남자는 내 말에 킥킥대기만 할 뿐 다른 어떤 얘기도 더 하지 않았다. 그와 헤어져 교실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머릿속으로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정리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 뭔지 확실해졌다.

 우선 그 엉터리 여신을 만나 쥐어 패기라도 해서 본인 해명을 들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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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짜는 주의해야 합니다.
 언젠가 채팅창에서 윤주라는 아이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저랑 다른 건, 한자랑 대괄호가 빠져 있었고 손님 아이디였다는 정도일까요;
 다른 채팅창에서 사용된 우연히 비슷한 아이디인지, 아니면 의도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살짝 소름이 돋긴 했습니다.

 앞으로의 연재 얘깁니다만, 어쩌면 내일을 포함해 다음 주 연재가 곤란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번 연재가 중단되면 2주 이상은 연재가 어렵게 되므로 가능하면 연재가 미리 끝나면 좋겠습니다만;
 일단 확실해지는데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들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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