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10 17:54

발큐리아! 16화

조회 수 386 추천 수 1 댓글 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이딴 세계 따위 무너져버려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호진과 혜미 사이에 참견하는 것도 쓸데없는 간섭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어째서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걸까.


 "절망은 번지는 속도를 예측할 수 없다! 주의해!"


 여신이 한 말대로, 조금 전까진 전혀 움직이지 않던 호진의 하얀 불꽃이 지금은 꾸물꾸물대며 살아 움직이는 양 주위를 향해 손길을 뻗었다. 개중 몇몇이 우리 쪽으로 기우는가 싶더니, 돌연 불길이 우리들의 발치를 향해 급격히 번져왔다. 불길이 닿는 바닥이 시커멓게 그을린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이쯤이야!"


 몸을 틀어 피했다고 생각한 순간, 눈 앞에서 불길이 갑자기 크게 일었다. 마치 장벽처럼 솟구친 불길은 그대로 내가 서 있는 주위를 향해 무너져내렸다. 거대한 해일을 상대하고 있는 기분이다.

 "윽...."

 반사적으로 몸을 빼며 한참이나 뒷걸음질쳐 물러났다. 조금 전까지 내가 서있던 자리 주위로 불길이 넓게 번져 있었다. 불길은 이제 스멀스멀 나를 향해 기어오며 주위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위험해!"


 여신의 외침에 고개를 돌려 보니, 혜미가 한쪽 구석에 내몰려 있는 게 보였다. 벽에 등을 기댄 채 혜미는 자기 키만큼 치솟아오른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그대로 놔두어 버릴까 하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이 손 잡아!"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보니 나는 어느새 혜미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불길 앞에서 조금 망설이긴 했지만, 나는 과감하게 불길 사이로 오른팔을 들이밀어 혜미를 붙잡았다. 불길 바깥에 서 있는 내 쪽으로 그녀를 당기는 순간, 나와 혜미 사이에 있던 불길이 갑자기 폭발하듯 솟구쳤다.


 "꺅!"


 한순간 불길에 휩싸인 혜미가 비명을 질렀다. 나는 화들짝 놀라 그녀를 내 쪽으로 당겨 품에 안았다. 다행히 불씨가 옮겨붙진 않은 듯했다. 겉보기엔 아무 이상 없이 멀쩡해 보이니 말이다.


 "만약을 대비해서 생명력을 끌어와 보충해 주마. 네 손으로 그 애 등골을 따라 그어 올려라."


 이그드라실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내 손 한쪽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혜미를 품에 안은 채 손을 더듬어 등 한가운데 움푹 패인 골을 따라 목 뒤까지 길게 선을 그었다. 푸른 기운이 옷 아래로 스며들어 살갗에 닿자, 혜미는 전신을 가볍게 떨었다.


 "괜찮냐?"

 "...기분나빠."

 "됐네, 그럼. 나도 같은 심정이니까."


 벽을 짚고 선 채 눈을 흘기는 혜미를 짐짓 모르는 채 하면서 나는 다시 호진을 둘러싼 불길을 마주했다. 솔직히 성가신 상대다. 닿기만 해도 생명을 뺏고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달려들건, 얼마나 강력한 무기를 쓰건 저 불길에 닿으면 소용이 없어져 버린다. 고작 나 하나로 뭘 할 수 있을까.


 "누나..."


 돌연 불길 너머에서 호진이 입을 열었다. 그 애가 말을 하리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나도, 혜미도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특히나 혜미는 살짝 들뜨기까지 한 목소리로 호응해 주기까지 했다.


 "호진아! 너 괜찮니? 아무 문제 없는거지?"

 "눈으로 보면 모르겠냐? 골빈 년..."


 내가 핀잔하자 혜미는 잠깐 나를 쏘아보더니 다시 호진을 쳐다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혜미의 눈동자가 놀란 듯 커졌다. 그 이유를, 나는 호진을 쳐다본 뒤에야 알 수 있었다. 호진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 어떡해...어떡하면 좋아..."


 불길의 장벽 앞에 혜미는 발만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못했다. 불안감과 무력감에 사로잡힌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좀 진정해! 나까지 정신사나워지잖아!"

 "그치만..."


 어느새 발치까지 다가온 불길을 피하느라 뒤로 물러서면, 그만큼 호진과의 거리도 멀어진다. 나는 호진의 작고 가녀린 몸을 가만히 보았다. 때묻지 않아 순수하고 귀여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심하게 흔들리던, 그러나 지금은 공허하게 빛을 잃고 고정되어 있는 눈동자를 보았다. 솔직히 상대하고 있으면 그 나약해 보이는 겉모습에 짜증도 났었다. 혜미 년 동생이란 걸 알았을 때도 이유 없이 불쾌해졌다. 어째서일까. 나와 상관없는 타인인데, 어째서 그렇게도 신경이 쓰였던 걸까.


 구해주고 싶었다. 세계의 멸망이고 자시고 하는 거창한 걸 떠나서, 그냥 그 녀석은 구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이유 따윈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다.


 "자, 잠깐만!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내가 불길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혜미가 깜짝 놀라 외쳤다. 그 소리엔 아랑곳없이 나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은 가야 할 때다. 호진이 저기서 부르고 있으니까. 다른 이유가 굳이 필요할까?


 "이그드라실."

 "...괜찮겠느냐?"


 처음으로 여신은 진심어린 걱정을 보여 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신은 한숨을 내쉬곤 내게 자신의, 세계수의 생명력을 보내기 시작했다.


 "네가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한, 생명력은 끊기지 않고 주어질 것이다. 하지만...지금 네가 생각하는 건 나로서도 단 한 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이다. 어쩌면 생각만큼 일이 풀리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할 생각이냐?"

 "상관없어."


 나는 짤막하게 대답하곤, 그대로 불길 속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불길에 닿는 온 몸이 달군 철에 닿는 양 고통스러웠지만 예상대로 움직이는 것에는 지장이 없었다. 불길이 내 생명력을 깎는 것과 동시에 여신이 준 생명력이 그만큼을 채워내기 때문이리라.


 "야! 나순정! 잘난 척 그만 하고 돌아오라구! 내 말 안 들려?!"


 내 돌발행동에 혜미는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그렇게나 눈엣가시처럼 생각한 주제에 막상 이런 광경을 보니 걱정이 되는 걸까?


 아니다, 저 년은 그저 자기 눈 앞에서 끔찍한 광경이 연출되는 걸 원치 않는 것뿐이겠지.


 처음엔 막 뛰어서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뛰어들고 보니 그렇지 않단 걸 깨달았다. 태어나서 겪어본 적 없는 고통 탓에 무릎을 꿇지 않는 것만도 다행일 지경이었다. 사방에서 살을 좀먹고 들어오는 불길이 이글거리는데, 여신이 주는 생명력은 말 그대로 생명력일 뿐이지 무슨 방호복 같은 게 아니라서, 기껏해야 불길에 닿아 닳은 부분을 회복해줄 뿐이다. 발큐리아가 된 것이 그나마 도움이 된 것이다.


 "오지 마...돌아 가란 말예요..."


 중간쯤 다다랐을까. 호진이 문득 입을 열어 건방진 소리를 해댔다. 웃기지 마.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생각보다 고통이 커서 정신을 붙들고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돼는, 그런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상관하지 말아요. 지난 번 그랬던 것처럼, 그냥 돌아가 주세요."

 "..."


 돌아갈 수 있겠냐! 속으로 몇 번이고 욕설을 되뇌었다. 여기까지 들어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가라고? 그런 모양새 빠지는 짓 내가 할쏘냐! 확실히 전엔 혜미 년이 참견하지 말란 말을 해서 잠자코 네 눈 앞에서 돌아간 적도 있었어. 그 년 말마따나 그 때 내겐 참견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이유가 생겼어. 그러니까,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야!


 "어째서...어째서 그렇게까지..."


 그 절망, 이제 함께 나누어 갖자.


 호진에게 다다랐을 때, 그의 주위에서 새하얀 불씨들이 갑자기 불기둥이 되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행여나 놓칠새라 나는 양 팔로 호진을 꼭 안아 붙잡았다. 눈을 감은 채, 나는 속으로 간절히 여신을 불렀다.


 '이그드라실!'

 "걱정 마라!"


 여신이 보내주는 생명력이 주위 불길과 맞닥뜨려 급속히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팔과 다리를 비롯해 몸 여기저기가 피가 통하지 않는 양 저릿저릿했다. 일순 격통이 사지 말단으로부터 타고올라왔기에 나는 참았던 비명을 끝내 질러야 했다. 머리가 터질 듯 괴롭고 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아아아악!!"


 그나마 다행인 건, 불씨는 본래 자신이 유래한 사람을 해치진 못한다는 사실이다. 언뜻 본 호진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어서 안도감마저 들었다. 혹시나 호진까지 상처를 입었더라면 더 구하기 힘들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믿을 수 없어. 죽으려고 환장한 거 아냐?"


 불길 밖에서 혜미가 나를 보며 질린 듯 말했다. 그 태도를 보고 있자니, 확실히 해둬야 할 말이 생각이 났다. 여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는 호진을 끌어안은 채 나는 혜미를 노려보았다.


 "왜,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내가 어쨌다고 그래?"

 "목숨 걸어볼 가치도 없는 거냐? 네 그 잘난 애정이란 건?"

 "뭐라고?"

 "겨우 그만한 애정 가지고 평생 곁에 붙들어 놓느니 하면서 괴롭혀 먹었냐고, 이 X만한 년아!"


 혜미는 당황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을 생각해내려 악착같이 머리를 굴려대는 것 같지만, 내가 그걸 기다려줄 리 만무하다.


 "야, 얘가 무슨 네 소유물이야? 어쩌다 지랄맞게 네 동생이 된 것 뿐이잖아? 우연일 뿐이잖아? 어째서 얘가 너한테 괴롭힘당해야 하는데? 비겁하게 뒤에서 손이나 쓰는 너까짓 년한테, 왜 얘가 시달려야 하는데!"

 "그러는 넌 뭔데? 우연히 내 동생을 만난 것밖엔 없는 생판 타인인 주제에, 넌 뭔데 내 동생 두고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아, 시발! 내가 얘 여친이다, 됐냐? 이 XX할 년아!"


 엉겁결에 꺼낸 말은 파급력이 컸다. 혜미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호진마저 깜짝 놀라 곁눈질로나마 내 얼굴을 보았다. 에라이, 이 참을 수 없는 부끄럼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뭔가 말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어차피 이딴 세계 멸망해 버려도 난 신경 안써! 딴 새끼들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야! 난 그냥 이 기집애같은 자식 하나 구해주고 싶은 것뿐이라고! 딴 년놈들이야 이 새끼 구하는 덤으로 제멋대로 구해지던가 말던가!"

 "말은 잘 하시네! 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 아무것도 변한 게 없잖아! 세상이건 호진이건 넌 아무것도 못 구해!"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고? 구할 수 없다고? 누가 그렇게 말하는데!"


 품에 호진을 껴안은 두 팔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혜미는 움찔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혜미 년을 조금 쏘아본 뒤, 나는 호진의 어깨 위에 가볍게 턱을 걸쳤다. 그 직후, 내가 호진의 귓가에 속삭인 말은 조금은 나답지 않은 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까지 하고 그냥 포기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나, 절대로 널 믿고 있으니깐."


 어쨌건 그 말 덕분인지, 아니면 타이밍이 그랬던 건지 하늘에 닿을 듯 치솟았던 불기둥이 언제 그랬냐는 양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불길이 사라지자 몸에 주어졌던 압박이 사라져 긴장이 풀렸다. 나는 온 몸에 힘이 풀려 꼴사납게 그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순정이 누나,"


 머리 위에서 호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호진은 완전히 정상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꼴사납게 울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미소짓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호진이 웃는 얼굴을 본 건 처음이다 싶었다.


 "야, 남자애가 꼴사납게 왜 울고 그래...얼굴 참 가관이다, 정말."

 "누나 때문이에요. 그건 알고 있어요?"

 "지랄한다. 킥,"

 "하하..."

 "킥킥킥..."

 "하하하하하하"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는 그 상태 그대로 웃음을 터트렸다. 기분은 두말할 것 없이 유쾌하기만 했다.


 이게 내 생애 처음으로 구한 남자친구다. 작은 몸집에, 얼굴이 귀엽고, 지나치게 순진하고, 손 많이 가고, 미덥지도 못한 꼬맹이지만,


 난 세상 누구보다 그 녀석이 소중하고, 또 누구보다도 그 녀석을 굳게 믿고 있다.






 그게 여신이 말한 사랑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 날 이후 단 한 번도, 여신은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발큐리아!>는 오늘이나 내일쯤 후일담으로 마무리짓겠습니다.
 완결 이후 얘기도 그때 적기로 하죠 ㅎ

 남은 이야기가 재밌어야 할텐데 말이죠;;
?
  • profile
    클레어^^ 2012.06.10 23:02
    오잉? 연하 남친???
    그냥 좀 돌봐주고 싶은 꼬맹이가 아니었나요?
    여하튼 해피엔딩이 될 것 같군요^^
  • profile
    윤주[尹主] 2012.06.11 03:10
    무리하게 밀어붙여 전개해봤어요. 역시 어색할까요?
    아무튼 두 사람에겐 해피 엔딩인 거라고 생각합니다^^;
  • profile
    욀슨 2012.06.11 00:50
    해피엔딩, 해피엔딩. 여신은 과연 어떻게 된 걸까요? 후일담 기대해볼게요.
  • profile
    윤주[尹主] 2012.06.11 03:11
    ㅎㅎ 별 얘기는 아닙니다만...기대해 주세요;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7 발큐리아! 완결편 4 윤주[尹主] 2012.06.11 382 1
» 발큐리아! 16화 4 윤주[尹主] 2012.06.10 386 1
15 발큐리아! 15화 4 윤주[尹主] 2012.06.09 465 1
14 발큐리아! 14화 5 윤주[尹主] 2012.06.09 422 1
13 발큐리아! 13화 5 윤주[尹主] 2012.06.08 389 1
12 발큐리아! 12화 7 윤주[尹主] 2012.06.06 456 1
11 발큐리아! 11화 12 윤주[尹主] 2012.06.04 435 2
10 발큐리아! 10화 2 윤주[尹主] 2012.06.03 507 1
9 발큐리아! 9화 5 윤주[尹主] 2012.06.01 479 1
8 발큐리아! 8화 1 윤주[尹主] 2012.05.31 439 1
7 발큐리아! 7화 2 윤주[尹主] 2012.05.30 405 1
6 발큐리아! 6화 2 윤주[尹主] 2012.05.28 1424 0
5 발큐리아! 5화 3 윤주[尹主] 2012.05.27 2780 1
4 발큐리아! 4화 2 윤주[尹主] 2012.05.23 424 1
3 발큐리아! 3화 6 윤주[尹主] 2012.05.22 540 1
2 발큐리아! 2화 3 윤주[尹主] 2012.05.17 597 0
1 [학원 판타지]발큐리아! 1화 5 윤주[尹主] 2012.05.16 640 1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약관] | [제휴문의] | [후원창구] | [인디사이드연혁]

Copyright © 1999 - 2016 INdiSide.com/(주)씨엘쓰리디 All Rights Reserved.
인디사이드 운영자 : 천무(이지선) | kernys(김원배) | 사신지(김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