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06 19:09

발큐리아!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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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 너머에서 햇살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 빛에 눈이 부셔서, 몸을 뒤척이며 이불을 끌어당겨 아예 머리 위까지 뒤집어 썼다. 한동안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전날 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방에 틀이박혀 이불을 둘러쓰고 있었다. 잠들고 싶었는데, 그냥 전부 다 잊어버리고 싶었는데 잠은 끝끝내 오지 않았다. 어제 기억도 오히려 더 생생해졌다.


 대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자문해 보았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시간만 공허하게 흘렀다. 망망대해에서 사방을 향해 구조 신호를 보내며 답신을 기다리는 표류자가 된 것 같았다. 그 신호가 결코 닿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여신의 말에 따르면, 세상이 멸망하는 건 오늘, 혹은 내일이었다. 공교롭게도, 학교에서 직원 회의가 열리는 것도 오늘이나 내일쯤이 될 거라고 했다. 여신과 학교, 양 쪽 가운데 하나라도 없었다면 호진에 대해 알게될 일도 없었을 거다. 바꾸어 말하면 여신이나 학교와 볼 일이 없어지면 호진과도 영영 인연이 끊어질 거다. 집으로 찾아가봐야 그 혜미년과 얼굴 마주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어찌됐건 오늘 혹은 내일, 모든 것이 결판이 난다. 나에 대한 것이건, 호진에 대한 것이건, 혹은 세계에 대한 것이건.






 해가 중천에 뜬 후에야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 나왔다. 뜻밖에도 마당에 있던 엄마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이제 일어났니? 배고프지? 밥 차려줄게 기다리렴."


 평소 같으면 필요없다고 퉁명스레 내뱉고 돌아섰을 텐데, 이상하게도 그럴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시장에 있어야 할 엄마가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게 그렇게나 어색했던 걸까? 쭈뼛쭈뼛 마루로 나와 보니 식탁 위에 이런저런 반찬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많이 먹으렴."


 엉거주춤 자리에 앉자 엄마가 때마침 공기에 밥을 한가득 퍼담아 내 앞에 놓았다. 내가 잠이 덜깬 건가? 뺨을 꼬집어봤지만 얼얼하기만 했다. 꿈은 아닌 모양이었다.


 "반찬도 많이 했으니까 골고루 먹어라. 갈치찜을 했는데 좀 짜려나?"

 "엄마."


 내가 일어나서 처음 입을 열었을 때, 엄마는 마침 자기 앞에 놓인 갈치살을 다듬어 내 수저 위에 올려주고 있었다. 어릴 땐 자주 엄마가 생선살을 발라내 내 수저에 올려주곤 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하지 않게 됐을까?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보단 더 후였던 거 같은데... 엄마가 시장에 나가면서부터? 거의 그쯤이었던 거 같다. 아, 맞아. 분명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엄마는 내게 생선살을 발라 준 적이 없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긴 했다. 하지만 꼭 이 말을 엄마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 이건 뭐야? 동반 자살이라도 하자고?"


 그 순간 엄마 얼굴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참았던 눈물을 이내 펑펑 쏟아내기 시작했다.


 "미안해...순정아, 내가 왜 그랬지....미안하다, 정말...."


 울먹이며 고개를 채 들지도 못하는 엄마를 보면서, 난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손을 대지도 않은 식탁을 치우다가, 부엌 한쪽에서 약병 하나가 굴러다니는 걸 보았다. 엄마는 농약 한 병을 구해다 음식에 섞었다고 말했다. 고춧가루며 양념들을 잔뜩 써서 어떻게든 감춰 보려 했던 모양이지만,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약 냄새를 완전히 가리지 못했던 것이다.


 "왜 그랬는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데?"

 "미안해...진짜, 그치만 이젠 나 혼자 순정이 널 돌볼 자신도 없고...요새는 생선도 안 팔려서 돈도 못 벌고..."


 한참 횡설수설하던 엄마 입에서 어느 순간 이런 말이 나왔다.


 "학교에서 전화가 왔었어."

 "뭐라고?"

 "맞은 애 학부모 하나가, 세상에 귀한 자식 얼굴을 이렇게 만들면 어쩌냐면서...합의금 내면 고소 않겠다는데....다 내 탓이다, 순정아. 미안하다..."

 "알았으니까 그만 해!"


 연신 미안하다고, 울먹이며 중얼대는 엄마를 팽개치고 대문 밖으로 나섰다. 조금 갈등하다가, 옆집 초인종을 눌러 아주머니를 불렀다. 평소 친척처럼 가까이 지내는 아주머니셨다. 아주머니가 나오자 나는 좀 전 엄마에게 있었던 일들을 그대로 얘기해 주었다.


 "그러니까 아주머니, 저희 엄마 좀 잘 좀 봐주세요. 부탁드릴게요."

 "그래, 알았다. 에휴, 저 사람이 어쩌다 그런 짓을..."


 나야말로 알고 싶었다. 어째서 엄마가 자살 따윌, 그것도 동반 자살 따위를 기도한 걸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유를 알고 싶느냐?"


 아주머니와 헤어지며 나오는 길에, 어디서 갑자기 여신이 튀어나왔다. 어째선지 여신은 평소와는 달리 우울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내게 여신의 표정 같은 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


 "뭔가 알고 있어?"

 "당연히 알고 있다. 그게 바로 세계가 무너져가는 징후니까."


 징후라고?


 "소원을 비는 대신 너희는 세계를 구해야 한다. 하지만 너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혹은 하지 못해서 세계가 멸망에 이르려 한다면 이런 징후가 나타나는 것이니라."

 "아, 씨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거든? 징후라니? 그게 대체 뭔데?"

 "세계가 멸망하려 하면 그 전에 여러 가지 징후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발생하는 형태는 여러가지지만, 대체적으로 징후는 소원을 빈 사람 주위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식으로 나타난다."

 "소원을 빈 사람 주위에서, 라고?"

 "부모나 형제, 친척, 애완동물....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고 어떤 식으로건 일어날 수 있다. 세계가 멸망하는 걸 막지 못한다면 더 많은 징후가 생겨날 거다."

 "전엔 그딴 말 없었잖아, 시발년아!"

 "말해주지 않았지만 너희가 멸망을 잘 막기만 했어도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었지."

 "이 X같은 새끼가..."

 "암튼 너희 두 사람만 믿고 기다릴 순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한 사람 소원을 더 들어주기로 했느니라."

 "뭐라고?"


 예상 밖인 여신의 말에 나는 또한번 화들짝 놀랐다. 여신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어째서 놀라느냐?"

 "당연하지. 세상이 오늘내일한다는데도 덥석 이루어질지 어떨지도 모를 소원을 비는 골빈 년이 있을 리가..."

 "너도 잘 아는 자다."


 여신이 이야기하는 게 누군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잠자코 있으니 여신이 의외의 이름을 꺼냈다.


 "혜미 말이다."

 "그 년이? 어째서! 지금 세상이 멸망한다면, 그 망할 년 때문일 게 분명한데!"

 "바라는 자가 있다면 누구든 소원을 빌 수 있다. 세상이 멸망하지 않게 해준다면 소원은 가능한 한 들어주느니라. 여신으로서,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

 "그 자의 소원은 이런 것이었다."


 내 말을 기다리지 않고 여신은 말을 이었다.


 "하나뿐인 남동생을 평생 곁에 두고 싶다, 그 애는 그렇게 빌었다."

 "흥, 평생 묶어두기라도 할 셈이야?"

 "그러면 안 되느냐?"

 "뭐라고?"

 "지금도 그 앤 자기 동생을 사실상 묶어 두고 있지 않느냐? 보이지만 않다 뿐이지, 족쇄를 채워두고 길들이는 거나 다를 바 없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생각해보면 혜미가 호진을 대하는 태도는 여신이 하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을 시켜 감시하고 괴롭히다가, 자신이 어르고 달래기를 반복한다. 당연하겠지만,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 리 없다.


 "그딴 소원..."

 "응?"

 "그딴 소원 누가 들어주게 할 거 같냐고!"

 "그렇다면 대체 어쩔 셈이냐? 이유야 어찌됐건 세상을 구하겠다는 그 자를 방해하기라도 할 셈이냐?"

 "세상을 구하기는 개뿔! 멸망하지만 않으면 아무래도 좋다는 거야? 그딴 소원이 이뤄지는 세상이!"


 여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저기, 혹시 일전에 내가 빌었던 소원 바꿀 수도 있을까?"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마. 무엇을 빌고 싶은 게냐?"

 "진호를, 혜미 그 년 손이 영영 닿지 않게 해주고 싶어. 그러니까, 혜미 그 년 소원을 없던 걸로 만들어 줘! 그 년도 소원을 빌었다면 너를 믿는 거 아냐? 믿는 사람을 조종하는 건 간단하다며?"

 "딱히 내가 조종을 하는 건 아니다만,"

 "그러니까! 돼, 안 돼? 그것만 확실히 하라고, 젠장할!"


 내가 열을 올리는 그 때, 어쩐지 여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던 것처럼 보였다. 표정이 바뀐 건 아주 잠깐 동안이었고, 그 후에 다시 평소 표정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나는 어쩐지 그것이 내 착각인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냐....결국 그렇게 하는 것이냐."


 홀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여신은, 이내 내 말에 대답을 해 주었다.


 "좋다. 그 소원, 반드시 들어주마. 그 대신 너는 나의 발큐리아가 되어라."

 "발큐리아? 그게 뭔데?"

 "발큐리아는 운명의 전사요, 신념의 기사다. 전선의 가장 선두에서 여신인 나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마음을 벼려낸 칼날로 적에게 철퇴를 선사하는 자다. 나는 세계수다. 세계수의 기사로 싸우는 한, 너는 무한한 생명력을 공급받을 수 있다. 물론 그대가 이번 싸움만을 한해서 내 기사가 되고자 한다면, 그것 또한 허락하겠다. 어떠냐? 싸우러 가는 네겐 좋은 우대가 아니더냐?"

 "정말 그걸로 괜찮지? 또 나중에 딴소리를 하면, 그땐 진짜..."

 "물론이다. 내 대리인으로서, 세상을 이번 멸망에서 구해 주기만 하면 그 이상 귀찮게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소원 또한 반드시 들어주고 말이다."

 "그럼 좋아. 그 발큐리아인가 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거지?"

 "너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 그저 네가 진정 구하고자 하는 것만 마음에 담고 있으면 된다."


 내가 진정 구하고자 하는 것. 내가 진짜로 바라 마지않는 것.


 더이상 망설일 생각은 없었다. 혜미를 두들겨 패서라도 진호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난 무엇이든지 할 것이다.


 내 다짐을 읽고서 여신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가라, 나의 발큐리아여. 그대와 나의 신념을 네 적에게 보여주고 오라."

 "거창한 소리 안 지껄여도 알아서 할 거야!"


 대답과 동시에, 나는 바닥을 박차고 거리를 내달렸다. 향하는 곳은 물론, 혜미네 집일 수밖에 없었다.


================================================

 이야기가 당초 계획과는 좀 바뀌었습니다; 원래 주인공 모녀 얘기는 이런 암담한 얘기가 아니었는데 말이죠;;

 아무튼 다음 화로부터 1, 2화, 길게 가도 5화 이내에 결말이 날 거 같습니다. 다음 글 올리면 좀 더 확실해지겠죠 ㅎ

 그럼 다음 화에 뵙겠습니다. 될 수 있으면 매일 연재 이어갈게요^^;
?
  • ?
    乾天HaNeuL 2012.06.06 20:53
    이렇게 호구기사 한 명 탄생요~! 왠지 가즈나이트에서 주신에게 낚인 리오 스나이퍼를 비롯한 신의 전사들이 떠오르넹~~~
  • ?
    츤데레 포인트걸 2012.06.06 20:53
    따, 딱히 乾天HaNeuL님이 좋아서 10포인트를 지급하는건 아니야!!
  • profile
    윤주[尹主] 2012.06.06 22:14
    ㅎㅎ 생각해보니 그렇게 보이긴 하네요;
  • profile
    욀슨 2012.06.06 23:56

    저러다 여신이 나중에 뒷통수라도 치는 건 아니겠지요. 잘 봤습니다.

  • profile
    윤주[尹主] 2012.06.07 07:31
    댓글 감사합니다 ㅎ
    이런 반응이 나오네요; 여신 캐릭터 구체적인 설정이 완벽하지가 않아서요...이것저것 실험해보고 있어요. 역시 그냥 애매모호한 면, 이중적인 면은 빼고 단순하게 그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 profile
    클레어^^ 2012.06.08 07:13
    그래서 제목이 발큐리아...;;
    아예 한방에 죽이는 힘도 생기지 않을까요?
  • profile
    윤주[尹主] 2012.06.08 07:50
    설마요...
    그런 거창한 힘 있었으면 이야기가 훨씬 쉽게 풀렸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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