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04 07:16

발큐리아! 11화

조회 수 435 추천 수 2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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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신과 얘기한 후로 줄곧 거리 이곳저곳을 한참 동안 쏘다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후 늦게까지 돌아다니면서도 아는 사람 얼굴은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우연히 발길이 제멋대로 호진과 혜미 년이 사는 집 쪽으로 닿기도 했다. 대문과 차고 문이 하나씩 있는 집들이 높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간혹 외제 차량들이 길을 지나갈 때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담벼락 쪽으로 돌리곤 몸을 잔뜩 위축시켰다. 이렇게 사람 기를 죽이는 동네에서 어떻게 호진이나 그 년은 멀쩡히 살 수 있을까?


 조금 서성인 끝에 호진이 사는 집을 찾아낼 수 있었다. 대문에서 정원 계단을 걸어 올라야 현관문 앞에 도달할 수 있는 큰 이층집이었다. 높은 담장 탓에 집 밖에서 안쪽을 보는 건 불가능했지만, 집 안에선 커다란 창문을 통해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대문에 조금 가까이 다가섰더니 커다란 검은 개가 불쑥 튀어나와 무섭게 짖어대는 통에 별 수 없이 담장에서 멀찍이 물러서야 했다.


 "혹시 내가 널 믿으면, 내 소원도 들어줄 수 있는거냐?"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곁에 있던 여신에게 물었다.


 "물론 들어줄 수 있다. 다만,"

 "소원이 이루어지기 전 세계가 멸망할 거라고? 그건 이미 들었어."

 "..."

 "혹시 말인데,"

 "그건 불가능하다."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여신은 딱 잘라 답했다.


 "내가 무슨 말할 줄 알고?"

 "아무리 나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나를 믿는 자에겐 그 운명을 바꾸어줄 수 있지만, 나를 믿지 않는 자의 운명은 크게 변화하지 않는 수준에서 조금 비껴가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존나 어렵게 말하네. 그러니까, 혜미 년을 네가 직접 상대할 순 없단 얘기지?"

 "네 말 그대로다."


 결국 혜미 그 년을 손보고 싶다면 내가 직접 담판을 지을 수밖에 없단 거다. 일단 주먹다짐을 하고 나면 그나마 조금 있던 학교로 돌아갈 가능성이 확실하게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토록 바랐던, 친구를 사귈 여지도 그만큼 줄어들테고 말이다.


 차라리 누군가를 위해서라고 핑계라도 댈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걸 싶었다.


 "아직 어떻게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느냐?"

 "몰라, 시발. 나랑 상관도 없는 일이잖아."

 "세계가 멸망한대도 말이냐?"

 "딱히 와닿지도 않는 얘기고."

 "그 애, 호진이가 다친대도?"

 "아, 그 새낀 관계 없다고!"


 호진은 친누나에게 괴롭힘당하는 것뿐이다. 정도가 좀 심하다곤 해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일까? 어차피 나는 그 숫기 없는 새끼랑 가족도 뭤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해 몸을 돌렸을 때, 기대하지 못한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게 누구야? 혹시 나순정? 정말로?"

 "윤혜미...너 이 시발 새끼가..."


 티셔츠와 청바지만 단출하게 걸친 차림으로, 한손엔 흰색 편의점 봉지를 든 채 혜미는 짗궂은 미소를 띄어 보였다. 조금 전 대낮에 보았던 그 년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 호진을 어르고 협박해서 끝내 자기 원하는 대답을 들어냈을 때 회심의 미소를 띄우던 그 모습이 말이다.


 "좀 전에 얘기 들었어. 동생을 만났다며?"

 "그래서 어쨌다고, 이 쌍년아."


 험한 말을 던졌지만 혜미는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내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가볍게 눈으로 훑더니, 돌연 내게 허리를 숙였다.


 "동생이 신세를 졌어. 고맙다고 말해 둘께."

 "이건 또 무슨 개지랄이냐? 아~, 아까 연기를 계속하시겠다? 힘들게 그럴 필요 없어. 다 알고 있으니까."

 "뭘 다 알고 있단 거야? 난 글쎄,"

 "네가 애들 시킨 거잖아, 이 개X같은 년아! 쳐 아니라고 얘기해 보시던가? 어디 한 군데 작살날 때까지 얻어맞아 보고 싶으면 말야."

 "애들을 시켜? 내가 뭘 말야?"

 '꼴값을 떤다, 쳇. 알잖아, 시발년아. 네 동생 새끼 손봐주라고 시킨 거, 너지? 아니면 그 새끼들이 어떻게 네 동생 손찌검할 생각을 하겠어? 너 무서워서 앞에서 벌벌 기는 새끼들인데."

 "잘 아네. 내 동생한테 손댈 수 있는 건 오로지 나 하나면 돼. 다른 사람들은 필요 없어."


 태연스레 혜미는 말을 바꾸었다. 그 태도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냐? 한 번 얘기나 들어보자, 엉?"

 "방금 얘기 못 들었어? 순정이 넌 머리가 나쁘구나? 말했지? 동생한테 손댈 수 있는 건 나 하나뿐이라고."

 "그게 무슨 상관인데, 이 개쌍년아!"

 "너야말로 무슨 상관이시냐고요. 내 동생을 내가 지지건 볶건, 너랑은 관계 없잖아. 안그래?"


 혜미도 조금 흥분했는지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내 오른손이 혜미를 향해 내밀어졌다. 멱살을 붙잡으려던 그 손을, 혜미는 냉정하게 뿌리쳐냈다.


 "이게 무슨 짓이야?"

 "개념줄 똑바로 잡고 살아라, 천하에 개쌍년아. 남이 상관않게 하려면, 애초부터 집안일에 남 끌어 들이지를 말았어야지. 왜 그 새끼들 시켜서 애새끼를 쥐어 패냐고, 호로쌍년 새꺄!"

 "남 집안일에 신경끄시죠? 걔네들 내 절친이거든? 친구가 고민 들어줄 수도 있는 거고, 부탁도 들어줄 수 있는 거 아냐? 아, 그렇지. 넌 아싸라서 모르겠구나? 부탁할 친구도 없는 찐찌버거라, 그치?"

 "아 시발, 이 잡년이 진짜!"

 "때려 봐, 자신 있으면 쳐 보라고! 여기 우리 동네거든? 내 몸에 손 닿기만 해봐? 확 폭행죄로 고소해 버릴 테니까!"


 욱하는 심정에 손을 들어올리자, 혜미는 꺅, 하고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몸을 잔뜩 움추리고 두 팔로 제 몸을 감싼 채 그녀는 별 반항도 하려 들지 않았다. 이 단계에서 이미 때릴 마음은 조금 사그라들어 있었다.


 게다가 혜미 년이 비명을 질러댄 탓에 주위에서 하나둘 인기척이 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퇴학 얘기가 나오고 있는 참에 사람들 눈에 이런 광경이 띄면 별로 좋지 않다. 그대로 돌아가려던 찰나, 문득 돌아본 혜미네 집 이층 창가에 그림자 하나가 어슬렁대는 게 눈에 띄었다. 불도 켜지 않은 방 창가에서, 그 체구 작은 그림자는 밖을, 정확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그것이 호진이리라고 나는 분명히 예감했다. 잘 보이지도 않아서 확인할 방법도 없었지만 어쩐지 그럴거란 생각이 들었다.


 호진이 보고 있단 생각이 들자 그나마 남아 있던 분마저 완전히 사그라들어 버렸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않고 집으로 돌아가자니 괜히 부끄러워졌다. 이대로 호진의 눈 앞에서 꼬리 말고 도망치는 개처럼 등 돌려 사라져버리자니 체면이 서지 않는다. 어쩌면 호진은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나 여신이 뭔가 손을 써줘서 상황이 이보다 나아지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호진의 기대에 응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것을 무시하고, 지켜줄 것 하나 남지 않은 이 세상도 무시해 버리고 잠자코 이대로 모든 지랄같은 것들과 함께 멸망해 버리길 기다려야 하는 걸까?


 잠시 동안 그렇게 꼼짝 않고 서 있다보니, 혜미가 슬그머니 실눈을 뜨고 쳐다보는 게 보였다. 그 년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내가 때릴 마음이 없단 걸 깨달았는지 입가를 다시 끌어올렸다. 순간 욕지기가 목젖까지 끌어올려졌지만 간신히 참곤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제 혜미는 내가 패배했단 사실을 확실히 눈치채 버렸다. 녀석이 뭔가 말하기 전, 이 쪽이 먼저 물러나야 했다.


 "...간다. 밤길 조심해라, 썩을 년아."

 "너나 잘하세요. 별볼일 없는 게."


 혜미가 도발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자코 그 자리를 물러서 떠났다. 몇 걸음인가를 떼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잠깐 고개를 돌리긴 했었다. 조금 전까지 분명 사람 형체가 있었던 이층 창가엔, 아까는 보이지 않던 커튼이 쳐져 있었다. 순간 분한 마음에 두 주먹이 꾹 쥐어졌다. 손톱이 살점을 파고들어 손바닥에 상처를 남길 만큼 세게 쥔 주먹이었지만, 아프단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 작은 꼬맹이 하나 구해줄 수 없단 게 이렇게나 분통 터지는 건지는 미처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

 글 잘 안풀려서 못올릴 뻔 했네요. 막판에 혜미가 등장해 구원해 줬습니다 ㅠㅠ

 금요일 퇴근하면서 얼굴을 좀 찧었습니다. 구두가 발에 안 맞는지, 계단에서 걸려 넘어졌어요;; 얼굴 한가운데 세로로 일차선 국도 같은 게 생겼네요;
 약 바르고 하니 생각보다 금방금방 나아가는 거 같긴 한데, 내일 회사가면 사람들 어떻게 보지 싶네요;;;

 아무튼 몸은 알아서 챙겨야 합니다. 누가 대신 챙겨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내일 또 뵙겠습니다. 이런 꼴 하고 있으니까 당분간 밤중까지 술먹을 일은 없을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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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yarsas 2012.06.04 07:24
    이런 다치셨군요 -_-; 조심하시지..
    문학란에 가장 많은 다작을 하신 윤주님 작품 시크릿부터 정주행 중입니다.
    이제 10화까지 봤네요. 언제쯤 발큐리아를 읽을 수 있을지.. 하하^^;
  • profile
    윤주[尹主] 2012.06.04 07:44
    yarsas 님 앞에선 내놓기 부끄러운 글들입니다 ㅠㅠ 읽어 주신다니 그것만으로도 감사드려요^^
  • ?
    다시 2012.06.04 17:38
    오 윤주님 술 드시는구나
  • ?
    포인트걸 2012.06.04 17:38
    따, 딱히 다시님이 좋아서 10포인트를 지급하는건 아니얏!!
  • profile
    윤주[尹主] 2012.06.05 16:01
    평생 먹을 술을 요 일이주 사이 먹는 느낌입니다;
  • profile
    욀슨 2012.06.05 07:24
    연재하시는 분들 보면 솔직히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군요. 앞으로의 전개도 기대하겠습니다.
  • ?
    츤데레 포인트걸 2012.06.05 07:24
    따, 딱히 욀슨님이 좋아서 10포인트를 지급하는건 아니야!!
  • profile
    윤주[尹主] 2012.06.05 16:02
    ㅎㅎ 욀슨님도 언젠가 좋은 장편 올려주시길 기대할게요^^
  • profile
    클레어^^ 2012.06.05 07:37

    헉! 괘, 괜찮으세요?
    근데 나중에 혜미가 갑자기 무릎 꿇고 비는 날이... (없겠지요?)

    (설마 주인공이 나중에 혜미를 한방에 죽인다든가는...)

    아, 아니다. 주위 사람 중 하나가 갑자기 변하면 세상이 망할 징조라 했죠?

    나중에 호진이 확 변해서 혜미를 죽인다든가 한다면....;;

  • profile
    윤주[尹主] 2012.06.05 16:04
    ....노코멘트입니다^^;;;

    오늘이나 내일중 다음 화 올리면 의문 풀리실 거에요;
  • ?
    乾天HaNeuL 2012.06.05 18:19
    정줄놓고 정독 완료. 다음 화를 빠른 시간 내에 뱉어내시기 바람 ㅋㅋㅋ
  • profile
    윤주[尹主] 2012.06.06 08:29
    오늘 내일 중엔 안보시겠죠? ㅎ

    내일 오전쯤엔 올릴 수 있을 거에요...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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