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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하들은 다 날 무서워하더라고. 참 이상한 일이지. 이렇게나......” 괴물이 발톱을 세워, 내 갑옷을 긁었다. 목 뒤의 털이 곤두서는 소음과 함께 갑옷에는 깊은 흠집이, 눅눅한 바닥에는 돌돌 말린 쇠 파편이 떨어졌다. “친절한데 말야.” 횃불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직접 갖다 대는데도 점액 때문인지, 비늘 때문인지 놈은 뜨거워하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그가 손가락 하나를 튕기자, 횃불이 뺨을 스쳤는지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심지어는 이렇게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도 말이지.” 괴물은 신음하는 나를 한심하다는 양 쳐다봤다. 상처에 맞대고 있던 손바닥에서 진물이 묻어 나왔다.

 

“창도 없고, 상자도 없고, 없는 것보다야 나은 횃불도 없군. 자, 이제 어떻게 할 건가?” 놈은 주먹을 치켜들었다. 아마 맞으면 쇳조각과 뼈, 그리고 살점이 지저분하게 엉겨 붙은 잔해가 되겠지. 뒤로 밀려날 정도의 바람이 일었다. 감고 있는 눈을 천천히 뜨자, 치명적인 공성추가 불과 1피트 앞에 멈춰 있었다. 놈이 껄껄 웃었다.

 

“멍청한 놈! 네놈은 그냥 겁쟁이에 비겁자야! 아무것도 못하는, 무능한 겁쟁이!” 놈은 그대로 손을 펴서, 나를 벽에 대고 짓눌렀다. 숨도 쉴 수 없었다. 점액과 악취가 온 몸을 파고들었다. 거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야 손이 떨어졌고, 나는 쓰러져서 바닥에 구르며 겨우 숨을 골랐다. 하지만 공기 한 모금도 마시기 전에 놈의 손이 다시 내리눌렀다. 폐가 찌그러지고, 안에 있던 공기 한 줌까지 모두 짜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더니 시야 한 쪽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내 의식은 그대로 고통과 고통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이번에는 눈, 다음에도 눈. 아직 살아 있는 동안 적당히 두들겨서 연하게 만든 다음, 팔다리 하나씩 찢어서 맛보면 되겠군.” 놈은 굉장히 들떠 있었다. 그리고 피도 채 마르지 않은 발톱을 다시 세웠다. 그것이 천천히 다가오는 동안,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팔로 얼굴을 감쌌다. 하지만 눈이 또 후벼 파이거나, 곤죽이 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멀리서 천둥이라도 울리는 것 같은 소리, 거기 이어지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놈이 피 말리는 비명을 질렀다. 눈을 떴다. 괴물이 형체도 없이 으깨진 가운데 머리를 더듬고 감싸고 있었다. 주위에는 뼈와 뇌수, 육편과 바위의 파편이 가득했다. 나는 눈을 돌려 주위를 바라봤다. 저 위에 작은 그림자들이 이쪽을 잠시 보는 것 같더니, 다시 사라졌다. 나는 놈이 날뛰는 와중 창이 속박을 벗어나자, 그걸 집었다. 머리 두 개가 쓸모없는 살덩이가 되어서도 놈은 살아 있었다. 나는 창에 온 무게를 다 실어, 놈에게 돌진했다. 불꽃이 튀었다. 끄트머리만 단단한 가죽 속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괴물은 이제 비명 지르는 것을 그만두고 비늘에 난 흠집 쪽을, 그리고 이어 이쪽을 봤다. 무거운 것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숙이며 피했지만, 다시 이쪽으로 꼬리가 돌아오는 바람에 팔 깊숙이 가시가 할퀴고 지나갔다. 몸 안에 독을 가득 찔러 넣었는지, 상처에 불을 부어넣는 것 같았다. 미처 뭔가 해보기도 전에 괴물이 주먹을 날렸다. 갑옷이 푹 하고 찌그러지며, 날카로운 파편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뱃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뒤로 나동그라지며, 나는 입 안에 가득 찬 것을 토해냈다. 온통 쇠 냄새가 풍겼다. 숨 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놈이 꼬리에 말아 쥐고 있던 궤짝을 손으로 가져갔다. 마을 건달이 시비 붙었을 때 벽돌이라도 잡는 것처럼.

 

“여기 좋은 물건이 있었군......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게 해 주마!” 놈이 궤짝을 치켜드는 순간, 그의 등 뒤로, 다리로, 온 몸으로 그림자 몇 개가 기어올랐다. 병든 빛에 그들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얼굴이 온통 귀로 뒤덮인 남자, 머리 위로 전부 거대한 촉수가 된 남자, 눈이 세 개 달린 여자...... 그들은 저마다 돌이나 녹슨 쇠창살 같은 조잡한 무기를 들고, 필사적으로 괴물을 찌르고 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죽어라, 건방진 벌레 놈들!” 괴물이 궤짝을 이쪽으로 내팽개치고 손바닥을 펴, 어깨에 붙었던 남자를 후려쳤다. 그는 비명도 질러보지 못하고 지저분한 피 얼룩이 되어버렸다. 괴물이 목에 달라붙어 있던 아줌마를 잡아, 몸 한가운데에 찢어져 있는 입을 한껏 벌렸다. 그걸 보고, 나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입으로 또 선지를 토하며, 궤짝의 뒷부분에 있던 틈에서 노끈을 꺼냈다. 다행히 젖어 있지는 않았다. 노끈을 쥔 채로, 궤짝을 놈의 뱃속으로 있는 힘껏 던졌다. 하지만 기분 나쁜 긁히는 소리와 함께, 상자는 괴물의 이빨 사이에 단단히 끼어버렸다. 놈은 오래 살아온 세월만큼, 이게 뭔지 대충 눈치 챈 모양이었다. 괴물은 아줌마를 뒤쪽으로 던져버리고-물기 많은 것이 으깨지는 불쾌한 소리가 났다-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나는 온 무게를 실어 상자를 들이 받았다. 걷어찼다.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상자가 놈의 입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돌연변이들이 그들 중 하나가 죽어 나갔는데도 더 맹렬하게 붙어 저항하는데다가, 몇 명이 더 나타나는 바람에 놈은 그들을 때려죽이는 것도 버거운 모양이었다. 자기 주인이 위기에 처했는데도, 졸개들은 뭘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내게는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조금씩 밀려나다가, 마침내 상자는 파편만 조금 남긴 채로 놈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커다란 손바닥이 서로 마주치는 것 같은 희한한 소리가 났다. 노끈은 이빨 사이에 끼어, 끊어지지 않고 비져나와 있었다. 끈의 겉을 따라 타액이 흘러내렸다. 나는 조각상에서 횃불을 뽑아, 그 쪽으로 던졌다. 불꽃이 노끈을 게걸스럽게 삼켰다. 그것까지 확인한 뒤 몸을 돌리고, 최대한 멀리 뛰었다. 그리고 엎드려서 기도했다.

 

잠시 뒤, 묵시록의 북소리가 퍼졌다.

 

***

 

싸구려 화약 탓에, 동굴은 온통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누가 귓가에서 연신 싸구려 냄비라도 때리는 것 같은, 높은 소리가 울렸다. 귀가 상한 모양이었다. 한참 뒤에 한 자 앞은 볼 수 있을 정도로 초연이 걷히자 용의 모습이 드러났다. 놈의 가슴 밑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체액과 피, 그리고 깨진 비늘이 강을 이뤘다. 폭발의 여파로 동굴이 무너졌는지, 회랑의 여기저기에는 파편이 널려 있었다. 나를 도와줬던 돌연변이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무사히 도망갔는지, 아니면 폭발에 휘말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놈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세가 약해지긴 했지만, 악의에 가득 찬 노란 눈이 이쪽을 노려봤다. 상반신에 뚫린 커다란 구멍 속에서, 거의 내 몸통만한 심장이 뛰고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 괴물이 발을 질질 끌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움직이는 것도 지독하게 힘들어 보였다. 나도 옆에 있던 창을 집었다. 모든 것을 끝내야만 할 때였다. 일어서자, 다리는 마치 허공이라도 디디고 있는 것처럼 지독하게 붕 뜬 것 같았다. 곧장 창을 세우고 놈의 심장을 향해 뛰었다. 한 순간의 도약 뒤, 창대를 타고 녹색의 피가 천천히 흘러내렸다. 오래 살아온, 하지만 죽어가는 생명의 박동도 전해졌다. 동시에 달군 쇠를 갖다 댄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왼쪽을 보니 괴물의 목이 보였다. 놈은 내 왼쪽에서 입을 뗐다. 물어뜯긴 자리는 지독하게 으깨져 있었다. 게다가, 팔은 원래 길이보다 훨씬 짧았다. 뒤쪽을 보니 뭔가가 떨어져 있었다. 지나치게 창백하고, 시체처럼 딱딱해 보였던 탓에 내 것 같지는 않았다.

 

“너는...... 이제부터 죽고 싶어도 죽지도 못하게 될 거야......” 피와 살점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괴물이 말했다. 그의 몸에서 생명이 빠져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말하는 중에도 놈의 심장의 상처는 점점 벌어지더니, 이윽고 피가 쏟아져 나왔다. “네가 그렇게 싫어했던 일그러진 모습으로, 옛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끔찍한 모습으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거야...... 영원히, 영원히. 네 혼이 썩어 들어가고, 잔인하고 안위만 추구하는 폭군만이 남을 때까지...... 너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남았던 머리가 늘어졌다. 뜨겁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온 몸을 적셨다. 팔이 떨어져 나간 상처도, 눈이 후벼 파인 자국에도, 가슴 한복판에 비집고 들어간 쇳조각에도. 괴물의 심장은 몇 번 느리게 뛰더니, 결국 완전히 멎어버렸다. 피는 내 온 몸을 적시고도 한참을 흘러내렸다. 흐려지는 초점을 애써 잡으며,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잔뜩 뒤집어 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느 새, 괴물의 졸개들이 파도를 이루며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최고의 죽음이었다. 내가 한 때 버리고 도망갔던 동료들처럼, 누구 입에 어디가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되겠지. 하지만 그들은 나를 찢어 죽이는 대신, 끊임없이 연창을 해 댔다. 그러며 연신 고개 숙여 절했다. 이제야 용의 마지막 말이 뭘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눈에서 눈물이, 입에서 미쳐버린 웃음이 흘러나왔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스쳐 지나가는 사이에 연창과 절은 계속됐다.

 

마치 집에 온 것 같은 포근함 속에, 잠기가 쏟아졌다. 언제 깨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자고 싶었다....... 일어나면 짚을 가득 채운 침대에서 툴툴거리며 자리끼라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차라리 죄다 꿈이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연창 소리도, 동굴의 모습도 한없이 멀어져 가고, 모르페우스의 날개가 펄럭였다.



  ***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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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yarsas 2012.09.15 20:48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인데 스토리의 줄기는 이해가 되면서도 어떤 목적을 향해 내용이 전개가 되고 있는지 감을 잡기가 좀 어렵습니다. 엔딩이 다가오면 이해가 되려나요. 이 힘겨운 싸움의 결말, 끝까지 지켜보겠습니다.
  • profile
    욀슨 2012.09.17 08:53
    이제 와서 이런 소리 해봐야 비겁한 변명이긴 합니다만,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설정이라던가, 인과관계라던가, 가장 중요한 퇴고라던가...... 덕분에 yarsas 님 말대로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붕 떠버린 감이 있습니다. 그래도 기왕 시작한 김에, 끝장을 봐야겠지요. 언제나 격려의 말씀 감사드립니다.
  • profile
    yarsas 2012.09.17 22:07
    원래 글쟁이는 한 작품이 끝날 때마다 한 단계 성장하는 법이지요. 욀슨 님이 느끼시기에 부족한 작품일지라도 다음 작품에 큰 자양분이 되리라는 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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