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09 09:18

기사를 위한 장송곡-9악장

조회 수 352 추천 수 2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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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좁아 보이는 길만 골라서 지나갔는데도, 놈이 따라오는 속도는 전혀 느려질 줄 몰랐다. 용이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동굴의 모든 것이 떨렸다. 바닥, 벽, 석순, 그리고 어둠 그 자체까지도. 그 어둠 속에 줄곧 웅크리고 있었을 텐데도 놈은 전혀 지치지 않는 것 같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시야 앞의 불빛과 인광, 걷힌 어둠 속의 풍광이 시야에서 멋대로 섞여 돌았다. 토할 것 같았다. 놈은 나를 찢어죽이기 전에 먼저 지치게 해서 죽일 생각인 것 같았다. 아까 가까스로 뛰어넘었던 절벽을 죽자 사자 뛰어넘자, 갑자기 놈이 소리쳤다.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했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마지막 숨이 빠져나갈 때까지 괴롭히며 죽여주마!” 동굴 전체가 외치는 것 같았다. 다시 큰 진동과 함께, 예리한 석순이 발 몇 발짝 앞에 떨어져 내렸다. 놈이 절벽을 뛰어서 건넌 모양이었다. 내 앞을 순찰하던 괴물들이 막아서다가, 뒤에 오는 것을 보고 모두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들을 밀치고 나는 계속 달렸다. 뒤에서 뭔가 입에 물고 지르는 것 같은 비명과 괴성, 자루에 자갈을 넣고 짐수레로 깔아뭉개는 것 같은 불쾌한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쿵쿵 소리의 주기는 점점 더 빨라졌다. 도저히 돌아볼 수가 없었다. 큰 벽이라도 무너뜨렸는지,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굉음이 들렸다. 놈의 말과, 주기적으로 울리는 쿵쿵 소리는 계속됐다. 계속 도망치던 와중, 갑자기 장딴지 한가운데에 격통이 찾아왔다. 하필이면 이럴 때 쥐가 난 것이었다. 다음 순간 나는 넘어져, 바닥의 구정물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나는 얕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부패하고 습한 독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주변 풍경이 빙글빙글 도는 가운데,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회랑이었다. 수많은 조각상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하나같이 실패자에 대한 조소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바닥에서 헐떡이고 있는 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놈의 비늘은 알 수 없는 액체로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악취와 피비린내, 그리고 먹잇감에 대한 흥분의 냄새가 풍겼다.

 

“난 아주 오래 전부터 여기 살고 있었지. 너희 털 없는 원숭이들이 나타나기 훨씬 오래 전부터 말이야.” 괴물이 말했다. 이제는 두 쌍이 된 그의 눈은 첨탑 위에 걸린 싯누런 달 같은 빛을 냈다. 몸통 한가운데의 입이 식사에 대한 기대로 징그럽게 꿈틀거렸다. 놈이 웃었다. 동굴의 벽이 수만의 비웃음으로 화답했다. 나는 발에 밟히지 않도록 주춤주춤 물러서며, 창을 뽑았다. 궤짝은 등에 단단히 맨 채였다. 용은 가소롭다는 것처럼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 날 네 종족 일부가 내 땅에 들어왔지. 한동안 부질없이 저항하고, 잡아먹히고, 끔찍한 죽음을 맞다가, 그래도 머리가 돌아가는 놈 하나가 내게 제안을 하더군. 자기 목숨을 건져 주고 약간의 보상만 준다면, 꼬박꼬박 인간 제물을 바치겠노라고 말이야.”

 

“그게 영주......” 입에서 제멋대로 말이 흘러 나왔다.

 

“틀렸어! 그 젖비린내 나는 놈이 엄마 뱃속에도 없었을 때였지. 밥이 입 안으로 절로 굴러오겠다는데 마다할 필요는 없었어. 하지만 놈들이 영 못미더웠던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나도 조건을 하나 걸었지.” 나는 놈이 다가올 때마다 천천히 간격을 벌렸다. 뒤를 보니 실이 이어져 있었다. 서서히 뒷걸음질 치는 속도를 빠르게 했지만, 뒤에 뭔가 단단하고도 미끈덕거리는 것에 부딪치는 바람에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놈의 꼬리가 내 뒤를 막고 있었다.

 

“원래 그렇게 말이 많나?” 잠시 시간을 끌어보려고 말하자, 괴물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그 비늘 덮인 손을 내 쪽으로 돌연 뻗었다. 창을 휘둘러 쳐내려고 했지만, 도리어 밀려났을 뿐이었다. 비늘이 어찌나 단단한지 불꽃이 튀었고, 자체에는 흠집도 나질 않았다. 끊임없이 틈새나 그런 부분을 눈으로 찾고 있었지만, 가운데에서 껄떡거리는 입을 제외하고는 창을 찔러 넣을 틈새조차 없었다.

 

“죽을 주제에 배짱도 좋군. 어차피 죽을 거지만 더 마음에 들었어. 조건은, 나와 영지의 인간들이 피를 섞어야 한다는 이야기였지. 네놈이 우연히 여기로 굴러들어왔다고 생각했겠지? 천만에! 내 피를 한 방울이라도 받은 놈들은 여기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고. 물고기 따위에서 볼 수 있는 본능 같은 거니까. 나는 내 수하이자 후손들을 마을로 몇 보내서 그 조건이 제대로 이행되는지 감시하고, 실행하도록 했어. 한동안은 좋았지. 제물도 꼬박꼬박 들어오고, 내 피를 받은 아이들이 속속 태어나고. 좁아터진 동네라, 내 피가 진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고 보니 말하지 않았군. 마시건, 뒤집어쓰건, 내 피는 너희들 속의 인자를 깨운다는 거. 물론 나이가 들면서 너희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인간의 허물도 점점 벗겨지긴 하지. 얼굴이 얽는 것부터 시작하던가? 최근에 나간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아하? 눈을 보니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군.” 용의 꼬리가 내 등에서 떨어졌다 싶더니, 마차에라도 치인 것 같은 충격이 나를 덮쳤다. 나는 쭉 밀려나서 벽을 들이받고는 미끄러져 내렸다. 등 뒤의 갑옷이 우그러졌는지 몹시 고통스러웠다. 저 멀리 궤짝이 널브러져 있었다. 얻어맞으면서 쇠사슬이 풀린 모양이었다. 창도 몇 발짝 앞에 뒹굴고 있었다. 놈은 나를 날려버리고 나서도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창 쪽으로 뛰어가자, 놈이 창을 밟아버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판돈은 컸고, 패는 족보 축에도 못 끼는 멍텅구리에 지나지 않았다. 애초에 이딴 괴물을 혼자서 어떻게 해 보겠다고 기어들어온 내 잘못이었다. “아까 내가 이야기했지?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젊은 친구.” 놈은 다 죽어가는 내 정신에 못을 박고 있었다. 마지막에 미쳐서 스스로 목을 조를 때가 되어서야, 놈은 지껄이기를 그만둘 것이었다. 투지가 한 순간에 녹아 내렸다. “근데 그 빌어먹을 놈들이 내 땅에 들어왔어. 하얀 두건 뒤집어 쓴 광신도들. 내 자손들 중 많은 아이들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어. 제물도, 숭배도 모두 끊겼지. 하지만 시간은 내 편이었어. 천천히 놈들을 내 자손들로 물갈이하고, 놈들의 소굴도 나를 섬기는 곳으로 완전히 바꿔 놓았지. 성체와 성혈 대신 내 피와 살을 먹게 했어. 아, 생각보다 훌륭한 방법이더군. ‘원래의 모습을 찾은’ 친구들은 내 동굴로 데려오고 말야. 제물을 받는 방식도 좀 바꿨어. 표면적으로는 ‘납치된 딸을 구해 달라’고 하고, 내 소굴까지 애써 기어들어온 멍청이들을 잡아먹는 것이었지.” 귀를 막아버리고 싶었다. 놈이 내 귓속에 독을 부어넣고 있었다. 나는 죽게 될 거다. 나는 죽게 될 거다. 틀림없이 죽게 될 거다. 몸이나 정신 중 어느 쪽이 먼저 무너질지는 모르지만, 시간 문제였다. “영주가 몇 번을 바뀌고-모두 나와 한통속이었지만-심지어는 딸도 없었던 작자가 꽤 있었지만, 레퍼토리는 언제나 똑같았지. 그래도 잘만 걸려들더군. 하지만 그것도 점점 줄어들더니, 이 무능한 멍청이 대에 와서는 감감무소식이 되었어.” 점점 뒷걸음질만 치다가, 등이 벽에 닿았다. 빈손보다는 나을 것 같아, 흉측한 조각상이 집고 있던 횃불을 집었다. 그나마도 횃불은 마지막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괴물이 나를 비웃듯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부질없이 횃불을 흔들어 댈 때마다, 나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얼굴을 잠시 뺄 뿐이었다. 샛노란 눈이 악의와 독기를 가득 품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놈은 계속 주절거렸다.

 

“게다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무지렁이 놈들은 날 기분 나쁜 옛 전설로만 치부하더군. 나를 섬기는 것도 아니고 말야.” 놈이 잠시 움직였다 싶더니, 눈앞에 내 궤짝이 교수형당한 시체처럼 매달려 있었다. 놈이 꼬리로 궤짝을 잡아, 내 앞에서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내가 잡아채려고 하자, 궤짝이 뒤로 쑥 빠졌다. 괴물은 날 놀리고 있었다. “결국 나는 내 아이들을 통해 놈을 협박했지. 더 이상 사람을 바치지 않겠다면 네놈들의 알량한 영지 째로 먹어치우겠다고. 그제서 놈이 정신이라도 차렸는지, 이것저것 갖다 바치더군.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이놈, 자기 눈 밖에 난 저놈...... 그리고 자기 형수까지. 야들야들한 애새끼-분명히 형수한테 애까지 딸렸다고 했는데 말이지!-고기를 먹지 못해 아쉽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해서 기분은 좋았지. 몇 년 전에는 영주 딸네미도 전리품으로 데려왔고, 배가 고파지려는 중 네가 찾아온 거야. 교회 놈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솔직히 기뻤지. 나는 내 자식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맛있어서 좋아하는 것에 더 가깝거든.” 놈이 다. 다. 시커먼 그을음이 피어오르며, 잠시 시야를 가렸다.


***


이 은 , 로, 로, 말 죠.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다시 고쳐 쓸지는. 게다가 늦었군요. 밤낮 일교차 심한데,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감기기운이 오는지 머리가 지끈거리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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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yarsas 2012.09.09 21:52
    이런 비밀이 있었군요.. 점점 내용이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군요. 마무리 기대하겠습니다.
  • profile
    욀슨 2012.09.10 05:21
    감사합니다. 길면 4화, 짧으면 2화 안에 끝나겠지요. 마지막까지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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