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01 08:22

기사를 위한 장송곡-8악장

조회 수 1180 추천 수 2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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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밑에서 해골이라도 밟는 것 같은 자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몇 번이나 그 구역질나는 보물들의 산이 나타나, 부딪칠 때도 있었다. 최악은 역시 저것들 중 하나가 무너져서 거기 깔려 죽는 것이리라. 문자 그대로 돈벼락이군. 하하. 횃불과 인광을 받아, 보물의 산과 바닥 전체를 뒤덮고 있는 점액이 불결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그러나 이 출처를 알 수 없는 금은보화보다도, 거기에 깔려 있는 점액보다도 나를 결정적으로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생명의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굳이 그 괴물들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다른 곳에는 박쥐가 날아다니고 바닥에는 이름도 알 수 없는 눈먼 벌레들과 쥐새끼들 정도는 기어 다녔다. 하지만 여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침묵과 죽음만이 도사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계속 걸어 다니다가, 커다란 새장과 비슷한 것과 마주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것처럼 새장에는 녹이 잔뜩 슬어 있었다. 역시 잔뜩 녹이 슨 바닥에는 무언가가 누워, 혹은 쓰러져 있었는데 잘 보이질 않았다. 횃불을 가져다 댔다가, 나는 급히 숨을 삼켰다. 시체였다. 비쩍 말라 있었고,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그렇게 상한 것 같진 않았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분명히...... 성에서. 그래, 성에서 본 얼굴이었다. 물론 그림으로만. 많이 마르기는 했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그럭저럭 초상화와 닮아 있었다. 그런 게 무색하게 죽어 있었지만. 다리의 힘이 풀렸다. 그 고생을 해서 왔더니, 여자는 이미 죽어 있었다고? 조금 서둘렀으면 일은 달라졌을까? 모른다. 어쩌면 딸이 죽은 지는 매우 오래 전이었고, 단순히 동굴의 기묘한 환경 때문에 아직 썩지 않았던 것일지도 몰랐다. 이대로 영주에게 돌아가서 보고하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뻔했다. ‘댁 딸은 이렇게 차디찬 시체가 되었수다.’ ‘뭐? 이놈의 목을 매어 멍청한 농노 놈들 구경거리나 되도록 저잣거리에 내걸어라!’ 하지만 어찌 되었건 시신을 여기다 두고 가는 건 영 뒷맛이 좋지 않았다. 구석에 보니 여닫는 문이 있었다. 자물쇠는 새장보다도 심하게 삭아서 살짝 건드리자 바스라지며, 그나마 남은 부분이 창살 안쪽으로 들어가 새장 바닥에 떨어졌다. 녹슨 쇠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어디에 ‘용’이 숨죽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심장이 울리는 소리 역시 줄어들 줄 모르고 도리어 동굴 전체에 울리는 것 같았다. 점점 내 박동이 빨라지자, 그 소리를 배경으로 깔려 있는 음험한 무언가의 박동이 비로소 귀에 잡혔다. 태고의 심연에서 울리는, 눈멀고 귀머거리인 신들이 치는 단조로운 북소리. 지금까지 동굴 그 자체인 척 하고 도사리고 있었던 그 무언가의 사악한 기대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등 뒤에서 창을 뽑았다. 그리고 동시에 눈 앞에 있던 어둠이 움직였다.

 

“이런 젠장할......”

 

입에서 저절로 욕설이 흘러 나왔다. 끝부분은 내가 듣기에도 무슨 늙은이의 단말마처럼 들렸다. 기분 나쁜 금속성의, 딸각거리는 소리. 어둠이 미끄러지고 꿈틀거리며 서서히 형체를 갖췄다. 그리고 동시에 어둠에 가려져 있던 수많은 횃불과 온통 벽을 뒤덮고 있었던 인광이 드러나 놈의 모습을 비췄다. 물론 그 무서운 박동소리가 배경에 깔려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뒷걸음질 치는 사이 놈의 뒤에서, 정확히는 어깨 뒤에서 머리가 두 개 솟았다. 파충류와 박쥐의 가장 혐오스러운 특징만을 골라서 결합해 놓았는데도, 기괴하게 인간과 닮은 머리가. 각각의 입에는 내 팔뚝만큼이나 길고 날카로운 이빨들이 빽빽이 나 있었고, 일부는 입가의 비늘과 살갗을 뚫고 마구 튀어나와 있었다. 빛조차도 삼키는 시커먼 비늘로 뒤덮인 온 몸은 점액 때문에 번들거려, 바로 앞에 서 있었는데도 윤곽과 형체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그 윤곽과 형체마저도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차갑고 끈적거리며, 꿈틀대는 동굴의 그 어둠 자체처럼. 흉측한 몸통에 고목나무만큼이나 두꺼운 팔다리가 달려 있었고, 팔다리의 끝에서 수많은 촉수들-끝에는 하나같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발톱인지 이빨을 달고 있었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등에서는 수많은 뼈와 가시로 이루어진, 날개 모양의 무언가가 뻗어 나왔다. 날개에 붙은 시커먼 피막은 그 불길한 박동에 따라 펄떡펄떡 뛰었다. 몸 한가운데에 세로로 입이 찢어져 있었다. 역시 입에는 수많은 이빨이 돋아나 있었고, 끊임없이 끈적거리는 타액을 바닥으로 흘렸다. 그리고 양 어깨 사이에 머리가 있었다. 비늘과 점액으로 뒤덮여 있고, 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하긴 했지만 역시 다른 머리들만큼 인간과 닮은 머리가. 징그럽게 거대한 덩치만 제외하고 모든 것이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몸의 모든 감각이 지금 당장 여기서 도망치라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횃불과 창, 그리고 궤짝을 붙잡고 제자리에 후들후들 떨면서 서 있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한 발을 디뎠다. 동굴 전체가 울렸고, 그 뒤를 해골만큼이나 불길한 빛깔의 가시가 가득 돋아난, 길고 미끈거리는 꼬리가 따랐다. 놈이 고개를 숙이자, 머리 세 개가 나를 에워쌌다. 악취나고 미지근한 숨 때문에, 갑옷의 겉에 김이 서렸다. 놈의 눈은 노란 색이었고, 동공은 가로로 찢어져 있었다. 세 쌍의 눈이 노려보는 가운데, 나는 천천히 창을 치켜들었다. 시야가 둘로 셋으로 마구 찢어졌다가 다시 겹쳤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걸.” 동굴 전체가 말하는 것 같았다. 덩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독으로 적신 벨벳 같은 목소리였다. 남자도, 여자도, 아무튼 인간의 어떤 발성과도 다른 목소리.창을 쥐고 있는 팔의 힘이 서서히 빠졌다. 괴물은 바로 앞까지 걸어와서 다리를 포개고 앉았다. 나는 진동 때문에 구역질나는 바닥에 넘어져 미끄러졌다. 필사적으로 몸에 묻은 점액을 닦고 있는 내 꼴을 보고 괴물이 코웃음을 쳤다. 악취와 공포 때문에 정신을 그대로 놓아버릴 것 같았지만, 의식을 잃으면 거기서 끝장날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찾아온 친구는 오랜만이군. 아니, 내 자손이라고 해야 할까.” 세 개의 입이 동시에 말했다.

 

“우...... 웃기는......” 하지만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의 조각이 머릿속에서 맞춰지는 것 같았다. 세 개의 머리가 새겨진 장신구. 마을 안에 있어도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는 사교집단. 그리고 처음부터 나를 사로잡았던 그 기묘한 기시감. 그래. 분명히 구역질나는 돌연변이, 특이한 피부병 정도로나 생각했었지.

 

“부정해봐야 소용 없어. 네 핏줄 속에 내 피가, 그것도 아주 진하게 흐르지 않았다면, 괴물 친구들에게 살아올 수 있을 리가 없지. 놈들의 본능 수준으로 각인되어 있거든. 잘 들어봐, 친구. 우리는 잘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차피 영주놈은 네가 날 죽이는 걸 바라지도 않아. 오히려 반대지.” 괴물이 말했다. "하하, 체급에서부터 가망성이 없는데 뭘."

 

“아니야. 거짓말이야.”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추악한 진실에서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괴물의 샛노란 눈 속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자를 눈 앞에 둔 토끼처럼. 뱀 앞의 개구리처럼. 괴물은 다시 한번 콧방귀를 뀌고는 말을 이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서 악의가 검게 방울져 떨어졌다. 기어오는 혼돈, 검은 부정형의 무언가. 가이아의 사생아. 있어서는 안될 것.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식을 팔아 개인의 안위를 사고 싶어 하겠나? 하지만 나는 그런 부모를 실제로 봤지. 그런 주제에 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핑계로 다른 무고한 사람들까지 이곳으로 보내고 말야. 물론 나는 그렇게 싫진 않았지만. 박쥐와 물고기에 비하면 맛은 좋았거든. 이봐. 여보세요? 여보세요? 내 말 들리나?” 눈 앞에서 초자연적인 공포가 제멋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괴물들에게 쫓겼을 때, 매번 그 소름끼치는 악몽을 꿀 때와는 차원이 다른 두려움이 온몸을 잡고 늘어졌다. 손의 힘이 점점 풀렸다. 그러다가 창이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자, 그제서야 주박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울 수 있었다. 괴물은 내가 듣건 말건 계속 지껄였다.

 

"하지만 내가 얼마 전에 이 동굴 속에서 생각해 본 건데 말야......" 나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창을 잡았다. "......지금 영주는 영 마음에 들질 않아. 제물도 영 시원찮고, 태도도 건방지기 짝이 없지. 무엇보다 나는 저 아이에게 조금이나마 동정심까지 들고 있거든." 괴물은 자기 떠드는 데 정신이 팔려,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좋은 기회였다. 도망갈 기회를 벌거나, 아니면 같이 죽을 때까지 시간을 벌거나. "그래서 말인데, 너를 이 영지의 새 영주로 앉혔으면 좋겠어." 괴물놈이 손바닥을 펴 보이며 말했다. 손가락 끄트머리마다 시커먼 강철 같은 발톱이 돋아나 있었다. 저걸로 내 알량한 갑옷과 가슴팍 한가운데에 주먹만한 구멍을 뚫을 때까지 내 심장은 잘해야 한번 정도 뛸 것이다. 가장 소름끼치는 것은, 이 괴물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 제물을 꼬박꼬박 받아먹은 주제에, 이 심연에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린애를 방치해 죽게 한 주제에 하는 짓이 늙어빠진 궁정의 너구리들과 다를 게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나도 '영주를 시켜주겠다'는 대목에서 귀가 솔깃하기도 했고.

    

"그래서 우리 젊은 친구. 어때? 자네라면 영주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려울 것 같으면 내 부하들을 보내 도와주지." 괴물과 내 주위에서 그 조그만 괴물들이 나타났다. 보물의 산 뒤에서, 보물의 산 속에서, 천정에서, 동굴의 심연 속에서, 그림자 속에서. 놈들은 동굴 입구에서 봤던 것보다 더 인간의 모습을 벗어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집안 사람인가? 얼굴이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어차피 한 집 건너 붙어먹는 동네에 그런 건 의미도 없지만. 아, 힘들게 살던 친구라 의심이 많구만. 그런 쓸모없는 물건은 내려놓으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협상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아무리 내가 더럽게 살아오고, 사람 속이기를 밥먹듯이 한 몸이지만 뒤에서 모든 것을 쥐고 조종한 인육 먹는 놈에게 뒷구멍이나 대 줄 정도로 썩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 나가서, 아니. 이 괴물과 함께 죽는 한이 있어도 영주에게 엿을 먹여야겠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꼭 모든 것에 대해 물어야겠다. "말 한마디면 돼. 자, 어서 말하라고. 나는 내 주인 (인간의 발성기관으로는 도저히 발음할 수 없는 몇 마디가 튀어나왔다), 위대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라고." 괴물은 슬슬 지겨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대답 대신 모든 힘을 담아 궤짝을 휘둘렀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동굴의 주인도, 부하 괴물들도 눈에 경악만을 담고 있었다. 물기 많은 것이 터지는 불쾌한 소리만이 퍼졌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괴물이 얻어 맞은 머리를 감싸쥐고, 고통과 분노에 가득 차 포효했다. 동굴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고,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석순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 사이를 피하며 쇠사슬을 거둬 들이자 궤짝에는 구역질나는 녹색 체액과 회백색의 곤죽이 묻어 있었다. 어깨 뒤로 보자 괴물은 축 늘어진 머리를 부여잡고 눈에 띄는 곳마다 닥치는 대로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해댔다. 동굴 자체가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두려울 정도로 날뛰고 있었다. 순전히 살기 위해서, 작은 놈들이 도망쳤다. 내 옆을 스쳐가는 놈들도 내게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왔던 곳으로, 미끌미끌한 바닥을 디디며 보물 산을 헤쳤다. 산 몇 개는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려, 치명적인 홍수가 되었다. 괴물 몇이 가장 호화로운 무덤에 삼켜져 버렸다. 마침내 놈이 걸어오는지, 뒤에서 진동과 함께 쿵쿵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바닥이 요동쳤다. 놈의 미지근한 숨결에서 풍기는 악취까지 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멍청한 새끼...... 너는 실수한 거야......!"

 

나는 계속 뛰었다. 잡히는 순간 그대로, 아주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게 될 것이다. 형용하기도 싫은 끔찍한 소리가 뒤따랐다.


--

요. 다음주부터 학기 시작인데, 제 때 연재 맞출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군요. 그래도 해봐야 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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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yarsas 2012.09.01 18:00
    진정 급전개로군요. 기사가 용의 자손이라는 부분이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어떤 의미죠?
  • profile
    욀슨 2012.09.03 07:01
    그건 다음 화에... 너무 늦었지만, 앞부분에서 전개를 너무 못 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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