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18 23:20

기사를 위한 장송곡-7악장

조회 수 324 추천 수 2 댓글 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기괴한 조각상들과 벽화는 더 늘어났다. 안을 밝히는 건 침침한 횃불의 빛과 균류의 인광밖에 없어, 그림과 조각상들은 보는 각도에 따라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벽화와 조각상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이 보여 칼을 뽑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거기에 더해 바닥은 점점 더 눅눅해지고, 좀 더 걷자 물까지 흐르고 있었다. 일부러 횃불을 가져다 대지 않는 한 발 밑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걸 확인하자고 굳이 밑에 불을 갖다댈 필요도 없었다. 벽면을 타고 균류가 잠식하며, 소름끼치는 인광을 뿜었으니까. 멀리서 철벅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안내인이 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옆의 시꺼먼 구멍으로 횃불을 던져 버린 뒤, 뒤쪽에 뚫린 작은 용식동에 숨었다. 보기보다는 넓어, 사람 하나 들어갈 공간은 있었다. 놈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놈이.......도망........”

 

“제물.......주인......”

 

잘 들리지도 않았고, 만일 귀를 기울이고 있었더라도 제대로 들렸을지는 의문이었다. 발음이고 뭐고 끔찍하게 뭉개져 있었으니까. 굳이 비슷한 소리를 찾자면 그 성당 놈들 정도일 것이다. 수가 상당히 많았는지, 계속해서 웅성거리는 소리, 그리고 주기적으로 크게 악쓰는 소리와 침묵이 찾아왔다. 상당한 수가 이동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한참을 쭈그리고 있었던 탓에 다리가 저렸다. 점점 감각까지 없어지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다리를 움직였는지, 밑에 깔려 있던 돌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밖에서 놈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순식간에 멈추고, 정적이 찾아왔다.

 

“......침입자......주인에게.......” 목소리 하나가 이쪽으로 가까워졌다. 철벅철벅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허리춤에 있는 칼에 손을 가져다 댔다. 놈이 토하는 역겨운 숨소리가 귓가에 닿는 것만 같았다. 손이 덜덜 떨리고, 어깨가 조이는 것 같은 환각이 찾아왔다. 어차피 뒤쪽으로는 못 올 것이다. 내가 죽기 전에는 한 놈쯤은... 한 놈쯤은 데려갈 수 있을 것이다.

 

“......쥐새끼......내버려.......”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숨소리와 철벅거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잠시 뒤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나는 그 다음에도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낑낑거리며 나오고 있을 때쯤, 뭔가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몹시 엉거주춤한 자세로, 하지만 빠르게 칼을 뽑았다.

 

“이봐, 놈들 떠났어! 빨리 가자고!” 안내인이었다. 그는 하마터면 내가 뽑은 칼에 찔릴 뻔하며, 작은 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나는 어디 부딪칠 때마다 저린 다리로 그의 뒤를 쫓았다. 멍청하게 가죽 끈 대신 쇠사슬을 택한 내 잘못도 있었지만 쇠사슬이, 내 갑옷이 사실과 판금끼리 부딪쳐 소리를 낼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영주에게는 동생이 있었지.” 계단 모양의 기괴한 폭포를 오르며 안내인이 말했다. 발밑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철벅거리는 소리가 났다. 냉기가 발에서 올라왔다. 횃불에 비친 갑옷은 습기 때문인지 부옇게 김이 서려 있었다. 올라오며 거의 미끄러질 뻔했지만, 안내인이 잡아 주어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여기저기에 심연이 아가리를 벌리고 서 있었기 때문에, 만일 그대로 미끄러졌더라면 몇 초인가의 소름끼치는 낙하 뒤에 다진 고기가 되었을 게 뻔했다.

 

“뜬금없는 이야기군.” 나는 궤짝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말했다.

 

“그 빌어먹을 개자식과는 얼굴만 비슷했지. 그래도 우리를 신경써주기는 했거든. 그때 들리던 이야기에 따르면 영주놈과 한번 대판 싸운 적도 있었던 모양이야.” 안내인은 그렇게 말하며, 건너편을 가리켰다. 뻥 뚫린 심연을 사이로 두고, 건너편에 흉측한 석순과 석주로 만들어진 발판이 서 있었다. 발만 디뎠다가는 당장 무너질 것 같았다.

 

“건너라고?”

 

“지름길은 이쪽이라니깐. 잔말 말고 뛰라고.” 안내인은 간단히 건너뛰었다. 그리고 이쪽을 돌아봤다. 확실히 거리는 얼마 안 되기는 했지만 젖은 부츠 바닥이 걸렸다. 나는 창을 제외한 짐을 차례로 던졌다. 안내인은 잠시 기우뚱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 받아냈다. 내 쪽을 쳐다보던 그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그들의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으니까. 철벅거리는 소리가.

 

“어서 뛰어! 놈들이 온다!”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발이 허공을 디뎠다. 착지하자마자 발밑에서 불길한 삐걱 소리가 났지만, 다행히 내 안내인이 끌어당겨 줬다. 내가 있었던 자리는 부스러지고 떨어져 내렸다. 나는 안내인과 함께 괴물들의 소름끼치는 소리를 뒤로 하고 뛰었다.

 

“가면 갈수록 놈들의 횡포는 더 심해졌네. 영지 안에서 성당에 도사린 괴물들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지. 그러던 어느 날, 영주의 동생이 갑자기 자취를 감췄네. 다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마누라도 자식도 있는 양반이 대체 어디로 갔을까. 하지만 그의 행방이 밝혀지는 건 가까운 시일 내였지.” 안내인이 말했다. 그는 누더기 같은 옷과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신발로 잘도 걸었다. 아니, 정확히는 신발이 필요 없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까 버렸던 횃불 대신 하나를 더 집었다. 켜 놓은지 오래됐는지 시꺼먼 그을음을 잔뜩 냈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횃불은 많아지긴 했지만, 관리 역시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하. 그래서?” 꺼진 횃불이 더 많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벽화와 조각상들은 더 기괴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전의 조각상과 벽화들이 단순히 심각한 수준의 기형만을 묘사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인간 이전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악몽 속에서 바로 기어나온 것 같은 바다생물의 추잡한 교잡종. 인간 따위는 발에 채이는 돌보다도 못할 정도로 거대한 파충류들. 그리고 그 직계후손들. 동굴로 숨고, 힘도 덩치도 그보다 약해졌지만 호시탐탐 인간을 몰아내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는 자들. 보고만 있어도 몹시나 심란해지는 것들이었지만, 사방 천지가 그런 조각상과 벽화뿐이니 눈을 감지 않는 이상에야 어쩔 순 없었다.

 

“완전히 뒤틀린 괴물이 되어버린 영주의 동생이, 마찬가지로 몇 명인가의 괴물들과 함께 마을 광장에 포박된 채로 나타났지. 영주는 동생이 괴물들에게 영지를 팔고 모두를 파멸시키려고 했다며, 그를 화형에 처했지. 성당 놈들의 배후에 동생이 있었다고 한 거야. 아무 것도 모르는 꼬마들과 저능아들, 그리고 몸도 마음도 괴물이랑 다를 게 없는 귀족놈들이나 좋아했다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항상 꾸던 꿈을 떠올렸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용병단을 전전하며 살았으니까. 하지만 횃불의 불꽃은 계속 떨렸다.

 

“물론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네. 하지만 잡혀올 때까지만 해도, 그가 처형당하기 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었지.”

 

“처자식이 있었다며.” 내가 물어보자, 안내인이 이쪽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의 멱살을 잡았다.

 

“어떻게 됐냐고!”

 

“이봐, 흥분하지 마.” 어차피 안내인 비위 거슬려봐야 좋을 것은 없었다. 나는 손을 놨다. “분명히 마누라와 아들이 있었지. 하지만 그 때 성당에 도사리고 있는 놈들이 동생이 살던 집으로 몰려가는 건 봤다네. 아마 죽었겠지.”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전부 빌어먹을 착각일 뿐이다.

 

한참을 걷고 몇 번을 급류에 휩쓸릴 뻔하면서, 나는 입 둘 달린 자의 안내를 따라 목적지에 도착했다. 횃불에 금은보화의 산이 비쳤다. 분명히 엄청난 양의 재보였고, 나는 영주의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보석들의 모양은 하나같이 소름끼치기 짝이 없었다. 어느 것이건 녹여서 무해한 금괴로 만들거나 해서 원형을 없애지 않는 한, 준다고 해도 마다할 법한 물건들이었다. 불빛이 흔들리고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보물의 산이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것 같은 기괴한 환각이 보였다. 광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여기야. 어찌어찌 찾아오기는 했군. 동굴의 주인은 항상 영주 딸을 곁에 두고 싶어하는 눈치더군. 어디 있는지는 알아서 찾으라고. 아, 마지막으로 부탁 좀 들어줄 수 있겠소?” 입 두개 달린 자가 이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내 칼자루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순간 소름이 싹 돋는 것을 느꼈다.

 

“뭐요."

 

“날 죽여주게.”

 

“젠장......”

 

“부탁이네. 다른 곳에 가 봐야 재판도 없이 말뚝에 묶여서 불타겠지. 그래, 영주놈 동생처럼. 그러고 보니 자네 그놈과 닮았군. 특히 눈이 말야. 그 자식놈이 살아 있다면 자네만 했겠지.” 나는 칼을 뽑았다. 손이 계속 떨렸다.

 

"젠장... 개소리 집어쳐." 잠시 뒤, 생명을 잃은 몸뚱이가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나는 앞으로 향했다. 안쪽은 이상하게 조명이 침침했는데, 암흑이 마치 밀도를 가지고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을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공허한 희망이었지만 어찌되었건 지금으로선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


--

찌 는 요. 다. 는 22터 디 올 이 마 할 것 다. 길.  


?
  • profile
    yarsas 2012.08.24 19:04
    아.. 이 분위기 ;ㅁ; 댓글 늦게 달아 죄송해요
  • profile
    욀슨 2012.08.27 22:22
    아뇨, 감사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5 <기사를 위한 장송곡> 추천사 1 윤주[尹主] 2012.10.07 528 2
14 기사를 위한 장송곡-13악장(完), Dal segno/Fine 2 욀슨 2012.09.29 638 3
13 기사를 위한 장송곡-12악장(Scherzo) 4 욀슨 2012.09.24 715 1
12 기사를 위한 장송곡-11악장 6 욀슨 2012.09.23 400 1
11 기사를 위한 장송곡-10악장 3 욀슨 2012.09.15 353 2
10 기사를 위한 장송곡-9악장 2 욀슨 2012.09.09 352 2
9 기사를 위한 장송곡-8악장 2 욀슨 2012.09.01 1180 2
» 기사를 위한 장송곡-7악장 2 욀슨 2012.08.18 324 2
7 기사를 위한 장송곡-6악장 2 욀슨 2012.08.12 424 2
6 기사를 위한 장송곡-5악장 2 욀슨 2012.08.04 356 1
5 기사를 위한 장송곡-4악장 2 욀슨 2012.07.28 420 2
4 기사를 위한 장송곡-3악장 2 욀슨 2012.07.21 484 1
3 기사를 위한 장송곡-2악장 2 욀슨 2012.07.14 380 1
2 기사를 위한 장송곡 -1악장 - 3 욀슨 2012.06.30 408 1
1 기사를 위한 장송곡~Prelude~ 3 욀슨 2012.06.27 671 1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약관] | [제휴문의] | [후원창구] | [인디사이드연혁]

Copyright © 1999 - 2016 INdiSide.com/(주)씨엘쓰리디 All Rights Reserved.
인디사이드 운영자 : 천무(이지선) | kernys(김원배) | 사신지(김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