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12 02:51

기사를 위한 장송곡-6악장

조회 수 424 추천 수 2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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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쪽으로 덮쳐오는 괴물을 간신히 피했다. 그리고 무게를 실어 팔을 휘둘렀다. 가죽 찢는 소리와 함께 녹색의 점액이 솟아 나왔다. 놈의 머리가 바닥에 뒹구는 것을 신호로 나머지 괴물 놈들도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옆에서 구역질나는 촉수를 휘두르던 놈의 눈알에 횃불을 박아 주었다. 사방에 지독한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났고, 놈은 바닥에 데굴데굴 굴렀다.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놈을 깊이 찌른 뒤, 뒤에 뒀던 궤짝의 쇠사슬을 대충 움켜쥐고 포위가 얇은 쪽을 향해 뛰었다. 뒤에서 멍청하게도 괴성을 크게 지르며 달려드는 놈이 있어서, 궤짝으로 후려쳤다. 퍽 하고 호박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문득 주위를 보자, 괴물 놈들은 위협만 할 뿐 직접 달려들지는 않았다. 앞에서 가로막는 놈들을 닥치는 대로 베고 쑤시자 녀석들도 나를 상대하는 게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렸다. 내게 부딪쳐서 괴물 둘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균류의 소름끼치는 인광만이 길을 밝혔다. 놈들이 뒤에서 지르는 괴성과 기어오며 내는 철벅거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놈들의 몸에서 나온 점액과 피에서 풍기는 악취는 사라지질 않았다. 뛰는 데 방해가 되니 궤짝을 등에다 다시 맸는데, 덕분에 코에 와닿는 악취는 한층 더 심해졌다. 길은 달릴 때마다 계속 좁아지고, 제멋대로 엉키고 꼬여 풀 수 없는 매듭처럼 변했다. 그럼에도 녹색 대리석으로 닦인 길은 끊어질 줄을 몰랐다. 차고 끈끈한 공간에 병든 빛만이 가득했다. 이제 보니 저 인광을 뿜는 균들도 일정한 간격을 따라 붙어 있었다. 하, 괴물 놈들이 저 점균들을 일일이 키워 심기라도 한단 말인가? 멍청한 생각이야. 멍청한 생각. 부츠가 바닥을 때리는 소리에 맛이 간 웃음소리가 섞여들었다.

 

숨이 턱에 걸리고 다시 물 떨어지는 소리와 박쥐나 알 수 없는 생물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을 때, 뭔가가 뒤에서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쪽으로 칼을 휘두르자, 당기는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바로 앞에 입을 벌리고 있는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했다. 손에 쥐고 있던 가파른 벽을 따라 자라난 균 덩어리조차도, 발 밑에 벌어진 지구의 위장 속까지 비추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옆에 굵은 석순이 있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욕을 내뱉으며 기어 올라와 그쪽을 보자, 나를 당기고 있던 것은 등 뒤에 매달려 있던 실이었다. 실은 말라비틀어진 지렁이 시체처럼, 아무렇게나 엉킨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일지도 몰랐다. 물론 나가는 건 더 어려워지긴 하겠지만, 실을 따라서 괴물놈들이 따라올 수도 있고, 또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몰랐으니까. 인광에 의지해서 통로를 따라가다가, 나는 건너편 회랑이 인광이 아닌 불로 밝혀져 있는 것을 봤다. 함정일지도 몰랐으므로, 나는 석순과 석주에 몸을 숨기고 그쪽을 향했다. 궤짝과 창, 갑옷의 판금이 부딪치며 내는 절걱절걱 소리가 멍청할 정도로 크게 울렸다. 다행히 누가 부러진 석순으로 내 뒤통수를 치는 일은 없었다. 가까이 가서 보자 벽을 따라 횃불들이 타고 있었다. 그 위에는 그을음 자욱이 길게 남았다.

 

더 가까이 가자, 복도 양 쪽으로 녹슬고 조잡한 쇠창살이 여럿 늘어서 있었다. 문 안에는 사람이 하나 갇혀 있었다. 아니, 사람이었던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분명히 인간의 모습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의 피부는 비늘로, 팔은 맹금의 발톱이나 촉수로 변해 비틀려 있었다. 더 끔찍한 건, 매 순간마다 그의 모습이 인간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단 것이다. 내가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그가 내게 말을 걸었다.

 

“영주의...... 딸을 구하러......온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진득진득한 점액에 덮힌 입술을 간신히 떼며 말을 이었다.

 

“......그 아이라면...... 아주 잘 지내고......”

 

그는 입이 메워져버리고, 이빨이 흉한 부스럼처럼 살을 뚫고 밖으로 삐져나오는 바람에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대신에 이마 한 가운데에 세로로 찢어진 입이 열리며 소름끼치는 쉿쉿 소리를 냈다. 나는 그의 눈을 봤다. 눈에서 진득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그를 애써 지나치며 다른 방으로 향했다. 방마다 괴물과 되다 만 괴물들이 텅 빈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들 옆을 지나가다가 나는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남자 하나를 찾아냈다. 눈 두개, 코 하나, 입... 두개였으니 다른 친구들보단 그래도 좀 나은 편이었다. 가까이 가자, 그가 이쪽을 돌아봤다.

 

"영주의 딸은 어디에 있지?" 남자는 이쪽을 보고 신기한 동물이라도 보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영주의 딸? 아... 그렇군. 댁은 영주 따까리들 중에서는 제일 오래 살아남은 편이요.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소..." 남자는 양 입으로 번갈아 지껄였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누가 내 밥통을 꽉 붙잡고 뒤트는 것 같았다.

 

"이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언제 그 괴물 놈들이 들이닥칠지 모르잖아." 그 말을 듣고 남자는 두 개의 입으로 기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댁이 그 친구들이라면 뭐하려 여길 살피겠소? 어차피 여기서 나가봐야 길만 잃고 굶어죽거나 다시 끌려올 뿐인데."

 

"젠장, 일단 내보내 줄 테니..." 나는 옆에 있던 돌을 들어 자물쇠를 내리쳤다. 이미 삭을 대로 삭아 있었던 자물쇠는 그것을 달고 있는 창살 째로 박살이 나 버렸다. 남자가 밖으로 기어 나왔다. "안내라도 해 보라고."

 

"다 쓸데없는 짓이야."

 

"나는 댁이랑은 달라서 살아 나가야겠으니, 같잖은 소리는 하지 마쇼." 그래도 갇혀 있는 건 싫었는지, 그는 곧 내 뒤를 따랐다. 나는 이미 미쳐버린 것 같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창살을 부수고 꺼내 줬다.

"이쪽이요. 따라오시오." 입 두 개 달린 남자가 앞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걷다가 뒤쪽을 보니 죄수들이 이쪽만 쳐다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일단 여기서 풀어줬으니 나가건 말건 맘대로들 하라고." 나는 마지막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동굴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이들이 있는 한편, 그 자리에서 멍하니 있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후자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어느 영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아줌마가 있었다. 하지만 이마 한 가운데에 눈이 하나 어지럽게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마 위로 모두 촉수로 변한 자가 있었다. 아마 촉수는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제멋대로 꿈틀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온 얼굴이 귀로 뒤덮인 자도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나는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면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아마 그랬다가는 괴물 놈들 품속으로 뛰어 들어갈 게 뻔했다. 나는 내 안내인을 묵묵히 따라갔다. 보인 김에 횃불도 집었다. 적어도 그놈의 인광보다는 마음이 놓일 테니까.

 

"이봐, 기사 양반. 우리가 어떤 꼴을 당한지는 전혀 모르고 있겠지." 안내인이 말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

 

“......흑사병이 영지에 손을 못 썼을 때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지금까지 그 정신 나간 짓을 한 게 헛되지는 않았다고 말이야.......” 나는 등 뒤를 돌아봤다. 뒤틀린 자들 몇 명이 내 뒤에 모여서,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계속 말해." 내가 말했다. 내 안내인이 낄낄거렸다. 이야기를 듣고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몹시 기대하는 것 같았다. "

 

“물론. 하지만 진짜 공포는 그 뒤였지......”

 

“마을에 있던 멀쩡한 신부가 갑자기 실종되더니-아니야, 이 안에서 묵주를 걸고 있는 해골을 본 것도 같아-소름끼치는 놈으로 바뀌었지……. 꽤 오래 전의 일이었어. 하! 사실 이 안에서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계속 그의 뒤를 쫓으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나는 감방 하나의 벽에 빗금이 쳐져 있는 것을 봤다. 빗금은 벽 전체에 걸쳐 가득 그어져 있었다. 깊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안은 더 많은 횃불로 밝혀져 있었다.

 

“이봐, 숙여!” 안내인이 말했다. 그가 석순 쪽으로 숨어버리는 바람에, 나 역시 영문도 모르고 그의 근처에 숨었다. “이 멍청한 양반아, 같이 숨으면 어쩌자는 거야!” 석순의 사이로 내다보자, 인광 아래로 아까 봤던 것과 비슷한 괴물들이 어슬렁어슬렁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지나가고 나서야 나와 안내인은 여정을 계속할 수 있었다. 나는 아까 꺼뜨린 횃불 대신 하나를 더 집어 들었다.

 

"새로 온 신부는 절대로 얼굴을 드러내질 않았어. 피부병에 시달리고 있다고는 했지만, 누가 그딴 걸 믿을까봐." 그가 중얼거렸다. 이제 그는 두 개의 입으로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냉기가 사방에서 몸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물이 더러워지기 시작했어. 주기적으로 오물이 강물에 섞여 내려오더군. 우물도 마찬가지였어. 구할 수 있는 물이란 물은 다 오염된 뒤였지." 그 물이라면 나도 몇 번 마신 적은 있었다. 다시 한 번, 누가 위장을 꽉 움켜쥐는 느낌이 들었다.

 

 

“신부는 우리에게 기도하기 전에는 성수로 손을 꼭 씻으라 했지……. 영주부터 그 소름끼치는 걸 바르기까지 하는데, 우리에게 거부권이 있을 리가 없었어.” 돌연 박쥐떼들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한참 팔을 휘젓는 등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것들을 쫓아내고 나서야, 계속 걸어갈 수 있었다. “이 세상의 물건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점성, 색깔, 아아! 아아아아아!!!”

 

"이봐, 괴물 놈들 다 듣겠어. 아무리 놈들이 여기 손 놨다고 해도." 그 말이 떨어지자 남자는 겨우 비명을 멈췄다. 그의 얼굴은 침침한 횃불 아래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계속하지. 아, 발밑은 조심하라고.” 대리석 길이 끊겨 있었다. 바닥은 더 미끈미끈했다. “물을 마시거나 '성수'를 바른 녀석들부터 변하기 시작했지. 영주 놈은 이야기가 다 끝났는지, 멀리서 보니 이미 얼굴은 얽은 지 오래였다네. 설상가상으로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어. 다 성당에 있는 놈들 주도로 일어난 일이었겠지.”

 

“댁은 언제 끌려왔지?”

 

“나도 잘 모르겠군. 분명 그 구역질나는 액체를 뒤집어 쓴 놈들 대부분은... 아니, 됐어. 그 중에서도 써먹지 못할 놈들이 그 감옥에 갇혀 있었지. 나도 마찬가지였고 말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굴을 넓히거나 바닥에 대리석을 까는 작업에 동원된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것도 시키질 않더군.”

 

“갇혀 있었던 주제에 어딘지 빠삭하더니.”

 

“뭐, 그런 거지.”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노예들이나 그들을 끌고 다니는 괴물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숨는 횟수 역시 크게 늘어났고, 아슬아슬한 순간도 몇 번이나 거쳤다. 확실히 나는 놈의, 괴물의 소굴로 들어가고 있었다. 

?
  • profile
    yarsas 2012.08.12 19:56
    아.. 왜 주인공이 죽을 것만 같죠 뉴누 진짜 바짝 쫄아가며 보고 있습니다.
  • profile
    욀슨 2012.08.13 09:16
    에이, 죽지는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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