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04 10:53

기사를 위한 장송곡-5악장

조회 수 356 추천 수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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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님,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바로 떠나도록 하지요.” 무릎이 후들후들 떨렸다. 사실 시종에게 안내받아 여기까지 오는 내내 떨리고 있긴 했다. 어디에나 그 문양이 보였다. 태피스트리. 시종의 옷. 시종의 팔. 시종의 눈동자. 성 안 모든 곳. 그 빌어먹을 표식이 눈에서 떠나질 않았다. 바닥이 떴다가 다시 가라앉는 것처럼 보였다. 몇 번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사물의 색도 제멋대로, 곡면에서 직선으로, 직선에서 곡면으로. 모든 감각이 뒤틀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놈들이 이상한 향이라도 피우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까 그 빌어먹을 광경을 봐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영주와 가신들의 모습에 그 괴물놈들이 겹쳐보였다. 처음에는 영주의 얼굴이 단순히 주름투성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오히려 비늘이 돋아나 있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그 때 봤던 주정뱅이와 똑같았다. 거기다 나는 그들이 이 더운 날에도 손 끝까지 장갑으로 감추고 있는 것을 봤다. 단순히 예절을 위해서? 질병을 막기 위해? 정말 그런 이유에서일까? 

"이제야 가는군. 꼭 내 딸을 구해주게. 부탁이네." 영주가 말했다. 첫 날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 거만한 표정이라니. 나는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무릎까지 꿇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딸은 과연 잡혀간 것일까? 아니면... 온갖 쓸데없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나돌았다. 영주가 목에 걸고 있는 펜던트에도 그 망할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미끈미끈한 녹색 돌에 새겨진 세 머리의 문양. 성수반에 담겨 있던 구역질나는 녹색의 액체. 

"물론입니다, 영주님." 

“어째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군. 그래서야 괴물은 잡을 수 있겠어?” 광대가 말했다. 심장이 뛰어올라 목울대를 후려갈겼다. 동시에 어지럽게 흔들리던 눈의 초점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다행히 영주나 가신들은 그의 말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광대에게 눈을 부라렸고, 영주가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에 신부님을 불러서 대대적인 환송식을 열도록 하지. 우리 백성들도 기쁘게 나올 걸세." 
신부라고? 심장이 이번에는 가랑이 사이까지 내려앉았다.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놈들은 지금쯤 그 더러운 굴에서 나를 어떻게 처치할지 의논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아닙니다, 영주님. 영지의 상황도 좋지 않은데, 저 하나 좋자고 그들에게 누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저는 돈 받고 일하는 입장일 뿐이고요." 급박한 상황이 오니 입에서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가신과 영주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내가 맘대로 걸려주지 않는 게 불편했는지, 아니면 영지 상황이 안 좋다는 대목에서 심기가 상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영주가 말했다. 

"어허! 영주님의 호의를 그렇게 무시하면 안 됩니다." 가신이 거들었다. 

"마음만은 감사히 받지요." 나는 무시하고 말을 계속 이었다. 딱 잘라 거절하자, 영주와 가신들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어차피 호위병도 제대로 고용하지 못해서,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나 같은 놈이나 쓰는 작자들이다. 놈들이 오늘 밤에 누구라도 보내서 날 해꼬지라도 할 리는 없었다. 들어오면서 본 호위병 막사는 텅텅 비어 있었는데, 아마 들판에서 일이라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보나마나 나보다 머리 두개씩 작은 친구들일 게 뻔하지. 

"알겠네. 아쉽군...... 행운을 비네." 영주가 말했다. 나는 그에게 작별 인사를 올리고, 역시 시종의 안내를 받아 성 밖으로 나갔다. "잘가! 멍청한 친구! 괴물 밥이나 되지 말라고!" 뒤에서 광대놈의 헛소리가 들렸다. 

***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나는 꾸려놨던 짐을 챙겨 마을을 나섰다. 역시 맞이하러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랐다. 산길에 들어서자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저번에도 온 적은 있었지만, 여전히 꺼림칙하기 짝이 없는 길이었다. 말에 묶어 놓은 궤짝이 절걱절걱 소리를 냈다. 벌써부터 썩은 냄새가 풍기는 가운데, 눈앞에 입을 쩍 벌린 동굴이 보였다. 대낮에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음습한 냄새와 숨 막힐 것 같은 미아즈마에 그대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망설였다. 안에는 대체 어떤 놈이 도사리고 있는 걸까. 마을의 그 성당에는 십자가 대신에 괴물의 상을 모시고 있었다. 그것과 비슷한 놈을 마주치게 되는 걸까. 그 끔찍한 연창이 아직도 뇌리를 메우고 있었다. ‘이아! 이아!’ 만일 들켰다면, 다음부터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는 정도로는 분명히 끝나지 않았겠지. 발가벗겨져서 이 동굴 안에 쳐넣어진다면 차라리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성당의 그놈들은 영주 눈을 벗어나서 뭔가 꾸미고 있는 건가? 내가 만일 괴물을 잡는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뭔가 함정을 파 놓은 게 아닐까? 나는 말을 입구에 세우고, 역청을 묻힌 막대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궤짝을 끌러 등에 맸다. 쇠사슬과 이미 등에 메고 있었던 창의 무게가 더해져, 걷는 게 그리 쉽진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말의 엉덩이를 쳤다. 말은 놀라 산길 쪽으로 뛰어가다가, 잠시 내 쪽을 봤다. 

"가, 가라고 멍청아!" 

나는 부러 난폭하게 주먹을 흔들고 돌을 던졌다. 말은 마지막으로 이쪽을 돌아보더니, 결국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눈가가 살짝 흐려졌다. 굶어 죽지는 않을 거다. 나름 혈통 있는 말이니 누가 알아서 보살피겠지. 똑똑하니까 산짐승 안 만나고 잘 도망가겠지. 허리춤에 차고 있는 주머니에서 실뭉치를 꺼내 갑옷 허리쯤에 묶었다. 저 옆에 고여 있는 웅덩이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씹는 맛이 좋은 먹이겠군. 마침내 나는 안쪽으로 한 발을 디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오후의 하늘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처음에도 그러더니, 내려갈수록 악취와 습한 기운은 더욱 심해졌다. 횃불에 언뜻 비친 동굴 벽은 온통 구역질나는 벽화와 부조로 장식되어 있었고, 바닥 역시 계단에서 궁전에나 깔려있을 법한 회녹색의 대리석으로 바뀌고 있었다. 벽화는 변색되고 색이 바래가고 있었고, 원래 각이 져 있었을 대리석은 모서리가 모두 둥글었다. 5년 전이라고? 맙소사. 그 알량한 영지에 영주, 아니 어떤 인간이 막대기를 꽂기 전부터도 이 장소는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브를 통해 닿는 감촉이 미끈미끈했다. 걷는 것도 고역이었다. 궤짝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벽에 부딪쳐 사방에 울렸다. 덩어리진 균류가 독기를 품은 인광을 뿜으며 여기저기를 잠식하고 있었고 괴괴한 인광 덕에 안은 초저녁 정도의 밝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횃불이 아닌 균류의 인광에 의지하기는 싫어서, 고집스럽게 횃불을 들고 한참을 내려갔다. 그리고 탁 트인 공간에 다다랐다. 횃불을 여기저기 비춰 보니 내가 있는 곳은 커다란 회랑이었다. 박쥐가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소리와 물 떨어지는 똑, 똑 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리고 지하수라도 흐르는 건지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계속 나아가자, 성당에서 봤던 것과 같은, 인간의 편린이 보이는 혐오스러운 조각상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어머니 자연의 사생아들. 건전한 규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몸에서 촉수니 이빨이, 머리에서 손발이 튀어나와 있고, 아닌 부분에는 거꾸로 선 비늘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괴물들. 만일 저게 이 동굴의 주인을 본떠서 만들어진 거라면, 어지간히 과시하기 좋아하는 놈이 분명했다. 뒤를 돌아보니 빛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꽤 깊이 왔다는 증거였다. 실은 차갑고 끈끈한 어둠 속으로 뻗어 있었고, 팽팽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실 한뭉치를 더 꺼내 그 끝에 동여맸다. 그 일을 끝내고 돌아본 순간 나는 숨을 들이켰다. 조각상의 그림자로부터 무언가 철벅거리며 나타났다. 아무도 가져가지도 못할 궤짝을 잠시 내려놓고 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여전히 다른 쪽에는 횃불을 들고, 등 뒤에는 창을 맨 채였다. 그림자와 벽의 모서리 등 전혀 예상 밖의 장소에서 나타난 괴물들은 온몸이 점액과 비늘, 그리고 가시와 촉수에 뒤덮여 있었다. 온 몸이 떨렸다. 이런 놈들이 아직도 이 세상에 남아 있었다니. 그 전쟁 이후로 더 이상은 안볼 줄 알았는데. 등 뒤를 넘겨다보자 뒤에서도 다섯 마리가 넘게 이쪽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수가 많았다. 괴물들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횃불과 인광에 놈들의 끈적끈적하고 미끌미끌한 몸이 번들거렸다. 생긴 건 꿈 속에서 화형당하던 괴물과 다를 게 그리 없었다. 다만 눈물까지 흘리던 그 괴물과는 달리 놈들의 눈에서는 아무 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습기와 악취, 그리고 눈 앞에서 저런 것들을 본 탓에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서로 거리를 재고 있던 와중, 제일 앞에 있던 놈이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놈의 아가리는 바늘 같은 이빨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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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 끝나고 나니 텐션이 뚝 떨어졌군요. 아무래도 핫식스를 다시 먹어야 할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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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yarsas 2012.08.04 17:15
    묘사량이 어마어마하군요. 그런데도 흐름이 끊기지 않고 몰입력이 엄청납니다. 기괴한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듭니다.
  • profile
    욀슨 2012.08.12 20:01
    감사합니다. 가끔씩은 너무 이쪽으로만 스타일이 고정되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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