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28 13:39

기사를 위한 장송곡-4악장

조회 수 420 추천 수 2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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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됐소.”

 

대장장이가 말했다. 때는 정오, 사거리에서 악마가 맴도는 시간이었다. 그는 나를 공방 안쪽으로 이끌었다. 나는 주문했던 물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관짝이었다. 여닫을 수 있는 뚜껑에, 쇠로 된 경첩과 리벳을 박은 모서리. 크기만 내 키 절반이었을 뿐이지. 좋아. 흑사병이 만연한 바깥에서 여기로 들어왔더니 용이랑 싸우러 가라고 그러고, 이젠 관짝이라니. 내가 만들라고 한 거니 할 말은 없었지만. 흔들어 보니 안에서는 쇳소리와 함께 모래 흐르는 소리가 났다.

 

“그거 조심해서 끌고 가야 할 거요. 솔직히 지금도 불안하다오.”

 

“알겠소. 나머지는?”

 

대장장이는 대답 대신 옆을 가리켰다. 주문했었던 창이 놓여 있었다. 차라리 거대한 쇠말뚝에 가까워 보이는 놈이었다. 날 부분은 딱딱하게 가공된 가죽에 싸여 있었는데, 들춰서 안을 보니 몹시나 예리했다. 갑옷은 완벽하게 수선되어, 겉에는 덤으로 흉악한 가시까지 돋아나 있었다. 내가 물건도 실을 겸 창을 들고 나가 뒤쪽 공터에서 몇 번 휘두르자, 대장장이는 제법 감명 받은 모습이었다. 휘두를 수 있을 정도면... 그래, 문제없었다. 나는 물건을 끌고 온 수레에 실었고, 대장장이가 도왔다.

 

“고맙소. 다 끝나고 나면 인사라도 하러 들르도록 하지.”

 

“흠, 그 상자는 만들면서도 대체 어쩌자는 건지 의문이 들기는 하더군. 아, 그리고 한 가지.”

 

“말해보쇼.”

 

“행여 성당에 들를 생각은 하지 마시오.” 무슨 헛소리냐고 할 생각이었지만, 대장장이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니 그럴 생각은 싹 사라졌다. 농담이나 헛소리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아니 왜, 거사를 앞두고 기도 정도는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어차피 거기 아무도 없었던 거 아니었소?”

 

“...아무튼 절대로 가지 마시오. 이 이상은 나도 못 말하니까. 알겠소?” 그는 말하면서도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엿듣고 있는 게 아닌지 몹시 걱정하는 것 같았다. 나는 더 묻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오면 술이라도 사겠다며 그를 안심시켰다.

 

나는 성당의 첨탑과, 시커먼 종을 올려다보았다. 대장장이는... 뭐, 어쩔 수 없었다. 내일이면 좋건 싫건 그 동굴에는 들어가야 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기도라도 할 겸 결국 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곳은... 단순히 관리를 안 한 것뿐만 아니라, 뭔가 섬뜩한 것이 이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뭐 어떤가. 성당일 뿐인데. 기댈 곳이라고는 이것 정도밖에는 없었다.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으니까. 그 때는 도망이라도 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가리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형국이니. 두꺼운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자, 그을음을 내며 타고 있는 촛대들이 양쪽으로 줄을 서 나를 맞았다. 예배당은 더 안쪽인 모양이었다. 내 움직임에 따라 촛불이 일렁이며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나는 복도를 따라 걷다가, 우렁찬 찬양 소리에 깜짝 놀라 촛대를 쳐 거의 쓰러뜨릴 뻔했다. 아무도 없는 게 아니었나? 위태롭게 기울어진 촛대를 붙잡고 있는 내 귀에 찬양의 내용이 들려왔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누구 덕분입니까?” 끓는 기름을 잔뜩 머금고 부글거리는 것 같은 끔찍한 목소리였다. 뭉개져서 부정확하고, 이 지방 특유의 기괴한 억양이 가미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목소리는 매우 크게 울렸다.

 

 “피로 맺어진 아버지! 여섯 쌍의 눈으로 내려다보시는 분! 이아! 이아!” 귀청이 터질 것 같은 후창이 뒤를 따랐다. 

 

“그 분의 보살핌 아래 우리는 모두 영원한 삶을 얻습니다. 그 분의 권능은 모두를 완벽하게 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버리고 도망친 배신자들에게도 오히려 더 큰 은혜로 답하십니다. 이런 어려운 때야말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희생! 희생! 희생! 피를! 대지에 피를!”

 

“무엇이 필요합니까? 여러분! 무엇이 필요합니까!”

 

“더 많은 제물! 제물! 제물!”

 

지금까지 들어본 찬양 중에서 가장 듣기 괴로운 것이었다. 성당 안이 어두침침했던 경우야 자주 있었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 찬양의 억양과 강약, 그리고 내용은 근본적으로 마음 깊숙한 곳을 후벼 파는 무언가가 있었다. 무엇보다, 찬양의 대상은 독생자가 아닌 무언가였다. 나는 그 소름끼치는 연창이 계속되는 가운데, 저 멀리서 불길한 오색의 불빛이 문턱을 넘어오는 것을 보았다.

 

슬쩍 들여다 본 예배당 안은 흡사 지옥을 방불케 했다. 촛불이나 그런 것으로 밝히는 것이 분명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일렁이며 신성모독적인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땅 속 깊숙한 곳에서 풀려나 인간의 왕국들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보이는 모든 것을 죽이고 범하는 악마들, 그리고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소름끼치는 존재.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 온통 시뻘건 호수. 그리고 역병과 기근의 모습들. 일곱 번째 대접을 쏟는 뿔 달린 천사. 파이프오르간이 포효하는 가운데 두건을 뒤집어 쓴 형체들이 부정한 의식을 거행하며 곧장 정신을 날려버릴 것 같은 연창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색, 시시각각 변하는 그 소름끼치는 오색! 워낙에 어두침침해서 어떤 놈들인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모두 구부정하고 뒤틀린 실루엣이 보통의 인간 같지는 않았다. 아아, 그 다리. 마치 발굽이라도 단 것처럼 절름거리는 그 걸음! 거기다 십자가와 성모상 대신 모신 그 혐오스러운 조각상. 꿈에서 봤던 그 괴물의 상이었다. 온 몸에서 뻗어 나온 촉수는 지금이라도 발작하듯 꿈틀거릴 것 같았고, 상 자체의 모습도 시시각각 녹아내리며 이형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얼굴에 씌워진 가면. 세 개의 얼굴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 그 소름끼치는 가면. 불빛의 탓인지, 그것이 조각되어 있는 녹색의 대리석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현기증이 났다. 빨리 여기서 나가야 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갔다. 다행히 그 패거리들 중 아무도 눈치 챈 것 같진 않았다. 오는 길에 아이 하나와 부딪쳤지만, 그저 계속 뛰었다. 비틀거리며 여관으로 돌아가, 장비를 모두 꺼내고 마굿간에서 말을 끌렀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말에 짐을 실었다. 계속 손이 후들거렸다. 과연 언제까지 엿본 사실이 들키지 않을 것인가? 들킨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왜 저 형상이 거기 있는 거지? 대장장이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손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자꾸 고삐가 손에서 미끄러졌다. 나는 숨을 가다듬고 생각했다. 장비는 모두 갖춰졌다. 그럼 다녀오기 전에 보고는 해야 하지 않겠나. 그 편이 더 수상해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엉망진창인 짐을 싣고 성으로 향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다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이건만, 낙원에서 이 지상까지의 거리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다. 마침내 도착해서, 성을 올려다보고 나는 숨을 삼켰다.

 

해자의 위쪽에, 아까 성당에서 본 가면과 같은 흉측한 문양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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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윤주[尹主] 2012.07.29 18:25
    ...악마의 수호라도 받는 동네인가요, 저 마을은;;;

    갈수록 괴기스런 분위기가 더해지네요. 덕분에 매 화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어요^^
  • profile
    yarsas 2012.07.30 02:47
    호러틱한 느낌이 느껴지는군요. 베르세르크 같은 느낌도 나고. 상당히 맘에 드는 분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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