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21 13:03

기사를 위한 장송곡-3악장

조회 수 484 추천 수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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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개를 몇 개나 넘었을까. 길은 좁기는 했지만, 이런 험한 곳 치고는 의외로 마차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닦여 있었다. 물론 닦는 것과 관리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 돌이 발에 채이는 건 예삿일이었다. 헐떡거리고 있는 와중에 잠시 고개를 돌려 옆을 봤다. 안내인으로 데려온 마을 사람이었는데, 비쩍 말랐지만 그 고개를 넘고도 지친 기색은 그리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출발할 때는 ‘그럭저럭 걸을 만한 거리요.’라고 말했지만, 이 사람들은 걸어갈 만한 거리의 기준이 나와는 완전히 다른 것 같았다. 아무튼 그 말에 혹한데다 어차피 산길이니 타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서 말을 끌고 오지 않은 것에 후회하고 있던 도중, 그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내 쪽을 돌아봤다.

 

“뭐, 뭐요.”

 

“저기요, 기사 양반.”

 

그는 저 건너편을 가리켰다. 동굴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주위의 기괴한 나무들과 산세 때문에, 굳이 괴물이 아니더라도 전혀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을 외관이었다. 동시에 며칠 후에는 저기에 머리를 들이밀어야 한다는 게 떠올라 착잡해졌다.

 

“그렇군.”

 

“나보고 들어가라고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시오. 제길! 여길 다시 올 거라고는...”

 

“지금부터 안쪽도 살피도록 하자고.” 안내인이 꼭 그래야만 하겠냐는 구슬픈 눈길로 쳐다봤다. “아, 농담이요. 이제 돌아가지.”

 

“그것 참 고마운 소리구려.”

 

돌아갈 때의 그의 발걸음은 묘하게 가벼워 보였다.

 

마을에 도착해서 나는 얼마 안 되는 돈을 쥐어주고 안내인을 돌려보냈다. 등이 축축했다. 어차피 물건이 완성될 때까지는 뭐 할 수 있는 것도 그리 없었기 때문에, 결국 나는 발걸음을 주점으로 향했다. 다 떨어져가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길게 울렸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안에는 테이블 몇 개에 카운터 하나, 그리고 카운터의 뒤에는 나이 든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구석에는 주정뱅이들 몇 명이 늘어져서 코를 골았다. 카운터에 앉자 주인이 이쪽을 쳐다봤다.

 

“주문은?”


“맥주.”


“시어빠진 포터가 있지. 물론 얼마 없으니까 저렴하게 드리는 건 좀 힘들지만. 괜찮겠소?"


“주쇼.” 시골 영지는 인심이 좋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해라.


그는 잠시 지하실로 내려갔다가, 넘치도록 담은 나무잔을 들고 나타났다. 맥주는 그의 말마따나 시금털털하고, 언제나 그렇듯 미지근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시궁창 구석 물을 뜬 것처럼 독한 것이 마실 만은 했다.


“흑사병은 다녀가지 않았던 모양이군.”


“바깥은 그런 걸로 난리인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놈의 괴물이 더 걱정이오. 지금은 제 동굴에 틀어 박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한창일 때는 하루에 한 명 꼴로 잡혀가고 그랬으니."


그런 거? 나는 순간 몹시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바깥은 난리 정도가 아니라, 세상이 끝장나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는데. 온통 사방에 시체가 썩고 불타는 냄새, 그리고 고통과 절망만이 감돌뿐이었다. 거리에는 기분 나쁜 새 가면을 뒤집어 쓴 역병 의사들, 그리고 십자가와 성물에 입을 맞추며 돌아다니는 신부와 환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다녀온 마을 중에서 그 불쾌한 손님이 나보다 먼저 다녀가지 않은 곳은 없었다. 여기만 제외한다면.


“그 병으로 죽은 사람이 없는 건가?”


“아, 딱 하나 죽긴 죽었지. 외지에서 여기로 와서 장사하는 친구가 하나 있었어. 분명히 여기서 돈을 벌어서 가정을 꾸릴 거라고 그랬었는데, 딱하기 짝이 없지. 시체를 태우고 외지에서 또 사람들이 오고 난리가 나긴 했지만 아직까진 별 일은 없소. 그 친구가 물건 조달이나 이런 건 다 맡고 있었는데, 덕분에 이래저래 귀찮게 된 것만 제외하면.”


“그런가.”


“그러고 보니 잔이 비었군. 한잔 더 드릴까.”


나는 말없이 잔을 내밀었다. 세 잔을 더 마시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일 텐데도 나가는 길까지는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두 개로 겹쳤다 흩어지는 시선으로, 문 근처의 테이블에 잠들어 있는 주정뱅이의 얼굴을 보았다. 햇빛이 맞닿는 그의 얼굴은 희안하게 얽어 뱀의 등 같았다. 하지만 흑사병의 흔적은 없었다.


역시 너무 많이 마셨는지,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귀에서는 연신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에서 들리는 웅성웅성 소리. 흥분해서 외치는 소리. 아주 잠시, 수레바퀴와 수많은 사람들의 다리가 보였다. 눈을 감았다 다시 뜨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서 다리를 질질 끌며 여관으로 향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지금까지 다녀갔던 곳 치고 그 빌어먹을 병이 퍼지지 않은 곳은 없었다. 여기는... 그래도 죽은 놈이 있기는 하지 않았나. 부자건 가난뱅이건 신부건 거지건, 나 같은 용병질 하던 놈이건 창녀건, 참회하며 십자가에 입 맞추는 자들까지 모두 가리지 않고 집어삼키는 병마. 과연 나는 단순히 운이 좋아서 병에 걸리지 않은 건가? 걸어서 올라와 침대에 눕자, 잠은 오질 않고 옛날 생각만이 떠올랐다.


***

 

그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에서 내가 아는 사람 대부분은 죽거나, 아니면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었다. 장군은 이교도들이 전부 괴물이라며 우릴 부추겼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왜냐면 놈들인 정말로 괴물들이었으니까. 처음에는 터번을 뒤집어 쓴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랑 비슷하게는 생겼었지만, 전투가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놈들은 인간의 모습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말에서 떨어진 동료가 살아있는 시체놈들과 혐오스러운 괴물들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는 걸 본 뒤에 나는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어릴 때부터 부모 얼굴도 모르고 자랐고, 용병단에서 변태들에게 뒤나 대 주고 뭐 빠지게 구르다가 여기에 와서 이제 개죽음까지 당하라는 건 사절이었다.

 

전날 실컷 약탈한 황금을 몰래 빼돌려 모래둔덕을 넘을 때, 나는 마지막으로 추격자가 오는지 확인하려고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추격자보다도 더 보고 싶지 않았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진지의 어스름한 불빛에 그 괴물들이 새까맣게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걷기도 힘들어하는 말에 열심히 박차를 가하며, 믿지도 않는 신에게 부디 동료들이 놈들을 내가 도망칠 때까지만 막아달라고,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멀리서 비명소리와 금속이 부딪치는 불협화음이 울려 퍼졌다. 다행히 식인 괴물 놈들도, 패잔병들도 날 쫓질 않았고 도중에 도적을 만나지도 않았다. 진짜로 신이 도왔다면 그런 상황이었겠지. 어쩌면 다 빌어먹을 운이었을 수도 있고. 나는 도망쳐 온 다음 사흘을 내리 잤다.

 

그 길로 나는 배를 탔다. 오랜만에 돌아온 세비야는 향신료 거래로 흥청망청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나는 분위기에 걸맞는 수준으로 돈을 날렸다. 멋진 옷, 쓰지도 않을 장신구, 비싼 저택, 향신료를 가득 친 식사-솔직히 맛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여자들, 여자들, 또 여자들. 그렇게 수년간 타락한 생활을 하고 나니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아침이면 안락한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밤에는 그때의 비명소리와 꿈에 시달렸다. 아무리 향락에 탐닉해도 도망갈 수는 없었다.


--

다음주에는 좀 더 신중하게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분명히 일어나서 보면 오타와 비문들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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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윤주[尹主] 2012.07.21 17:40
    흑사병에 이어 십자군까지, 점점 얘기가 구체적이 되어가네요. 흥미진진합니다 ㅎ
    재밌게 봤어요~
  • profile
    yarsas 2012.07.24 08:32
    아직까지는 감이 잘 안 잡히는군요. 다음 화를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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