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14 09:01

기사를 위한 장송곡-2악장

조회 수 380 추천 수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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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일어났다. 여관 주인이 모습을 살피려는지 들어왔다가, 픽 웃고는 다시 나갔다. 언제나 이랬다. 대체 그게 누구였는지, 아는 사람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저 악몽과 피어올랐다 사라져 버리는 허상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갑옷을 대충 닦아서 들고 나왔다. 오랜만에 갑옷도 벗고-들고 있었던 덕에 변한 건 하나도 없긴 했다- 평복만 입고 있는 건 좋았지만, 가장 나쁜 건 내가 아직도 이 동네에 있다는 것이었다. 여관에서 나오자마자 곰팡내나는 공기가 폐 안을 가득 채웠다. 어쩔 수 없지. 일이 아니더라도 당분간 이 동네에서 살아야 하는데 뭐. 흙길을 쭉 내려가며 주변 경관을 살폈다. 강 하나가 산 쪽에서 흘러내려오며 영지를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아마 이 동네의 음습함에 한몫 더 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가까이 가서 본 강은 보기보다 깊어, 뭔가 소름끼치는 비밀이라도 뱃속에 감춰두고 있는 것 같았다. 초록 이빨 제니나 켈피는 저런 물 깊숙한 바닥에 도사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어제 들은 대로 물비린내 나는 강둑을 따라 쭉 내려가자, 멀리서 담금질하는 은은한 소리가 들렸다. 기슭에서 피어오른 안개로 잘 보이지는 않았다. 가까이 갈수록 대장간의 모습은 선명해지고 담금질 소리는 더욱 커졌다. 내가 문지방을 밟자, 대장장이가 망치질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봤다. 눈이 하나 없는, 정확히는 오른쪽 눈 대신에 커다란 상처 하나가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는 남자였다. 흔한 일이었다. 물론 ‘신심을 위한 원정’이니, ‘정의의 전쟁’이라느니, 좀 노골적으로는 ‘한 몫 크게 챙겨서 올 수 있다’느니. 아, 마지막은 아주 헛소리는 아니었다. 온갖 그럴싸한 소리에 낚여서 간 녀석들-물론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한몫 잡아보거나 밥이라도 먹여줄까 싶어서 따라간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 중에서는 나같이 몸 멀쩡하게 돌아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보통은 몸 어딘가를 하나 잃은 다음에 고향에 돌아오게 마련이었다.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오면 마누라는 옆집 멍청이하고 눈이 맞아서 도망간 지 오래인 거지. 눈앞의 이치는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안녕하시오.”


“아, 좋은 아침이군. 소문은 익히 들었소."


"내가 온지는 사흘도 채 안 됐는데."


"손바닥만한 동네에서야 당연한 일이지. 천천히 둘러보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자기 일로 돌아갔다. 대장간 안에는 온갖 농기구, 만들다 만 갑옷, 투박하지만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무기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 주로 먼지가 쌓여 있는 건 갑옷이나 무기 쪽이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대장장이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돌아봤다.


“내가 온 건 다른 게 아니고, 뭔가 만들어 줄 수 있나 해서 말야.”


“이봐, 떠돌이 양반. 내가 당신이라면 이 길로 마을을 떠나 다신 돌아오지 않겠어. 그 괴물을 처치할 수나 있을 것 같아?” 그가 왼손으로 눈을 가리켰다. “이 눈도 그 빌어먹을 놈에게...” 내 예상은 훌륭하게 빗나갔다. 그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고 금방이라도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가라앉히고는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뭔지나 말해봐.”


나는 그에게 머릿속에 담아놓은 것을 그대로 말했다. 그의 표정이 말도 안되는 개소리나 하지 말라는 풍에서, 이놈 제법 그럴싸한 소리 하네, 그리고 입의 침이 마를 때쯤에는 그래서 어쩌라는 식으로 변해갔다.


“흥, 짱구는 제법 굴리는 모양이군.”


“이래뵈도 글도 읽을 줄 안다고.”


“아니, 별로 안 궁금했거든. 머리 굴러가는 것과는 별개로 댁 대장장이 일하는 거 옆에서 한번이라도 본 적은 있수?" 그는 기름때 잔뜩 묻은 오른손으로 코를 후빈 뒤, 그것을 뒤로 탁 튀겼다. 그는 시커먼 덩어리가 엄지손가락 안쪽에 붙어 있는 걸 보고서는 그대로 그것을 바지에 닦아버렸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리고 이것도 좀 손질해 줘.” 나는 그에게 주머니 하나와 함께 들고 있던 갑옷을 건넸다. 그가 안을 들여다보자, 그의 콧구멍만했던 눈이 나만큼 커졌다. 이내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흠... 아니, 멍청아.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 갑옷 손질이야 일도 아니긴 하지만, 그런 걸 사흘 만에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잖수. 헹, 댁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영주는 성격이 더럽다고. 댁이 대롱대롱 매달린 꼴을 생각하니 내 가슴까지 아리는구만.” 전혀 가슴아파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돈 받았으면 일이나 해, 돼지새끼야. 재수 없는 소리나 하지 말고.” "뭐 이 자식아, 나도 왕년에는..." 망치를 치켜드는 그에게 나는 주머니 하나를 더 건넸다. “이것도 받아 둬.” 대장장이가 주머니를 나꿔챘다. 그는 안을 들여다보고 대번에 얼굴이 펴졌다.


"흐흐, 알았수다. 사흘 뒤에 오슈.”


나는 대장간을 뒤로 했다. 잘그랑거리는 소리로 보아 보나마나 몇 푼이나 되는지 세고 있을 게 분명했다. 강에서 피어오르는 미아즈마(독기)와 함께, 산지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강 기슭을 올라가며 왼쪽을 보자, 물안개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집들은 오래된 데다가 다른 곳에서는 구경도 해보지 못한 특이한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나는 여관 주인이 그런 양식으로 집을 짓지 않은 것이 실로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악은 역시 성이었다. 어제 거기 들어가면서도 느꼈지만, 거긴 영주가 산다기보다는 옛날에 자주 읊곤 하던 소네트에 나오는 마왕의 성처럼 보였다. 영지 주위의 산은 굳이 용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더라도 딱 초자연적인 무엇인가 도사리고 있을 것 같았다. 동시에 다른 영지에서는 맡을 수 없는 쿰쿰한 냄새. 아무리 산이고 습한 동네라고 해도, 이건 물이나 나무보다는 시체가 썩은 것 같은 냄새였다. 왜 그렇게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냐고? 동네 신부에게 속아서 몇 년 동안 모래 둔덕을 넘다 보면 필연적으로 맡게 되니까. 지금 어떤 도시를 돌아다녀 봐도 골목마다, 공터마다 시커멓게 부어오른 시체들이 무덤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쌓여서 썩어가고 있으니까. 시체 썩는 냄새가 어떤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 악취는 이 시대의 냄새일지도 몰랐다. 망령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멀리서 농노들이 이미 마름병의 손아귀에 떨어져 가망 없는 농지에서, 어떻게든 뭔가 하나라도 건져보려고 필사적이었다. 굶어 죽는 것과 병들어 죽는 것 중 어떤 게 나쁠까. 알 수 없었다.


호감갈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영지였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여긴 너무나도 익숙했다. 어차피 여기 당분간 있을 거니 익숙해져서 나쁠 거야 없겠지. 하지만 여기 와본 적이라고는 한번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솔직히 그 병이 아니었다면 왕도나 그 언저리의 동네에 가서 귀부인들이랑 놀아났을 테지, 이런 곳에는 오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모든 것이 익숙했다. 아침에 피어오르는 독기 가득한 물안개, 악몽에서나 볼 법한 깎아지른 첨탑들. 인간보다는 파충류에 가깝게 생긴 기분 나쁜 사람들. 기분이 더러워졌다. 하지만 상관없다. 일만 어떻게 해결되고 내가 그때까지 살아만 있으면, 병이 좀 진정되었다는 이야기만 들리면 바로 여길 뜰 테니까. 아니면 또 배를 탈지도 몰랐다.


***


--

한 주 쉰 주제에 분량까지 줄어서 미안합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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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윤주[尹主] 2012.07.14 15:56
    분량은 문제가 아니죠 ㅎ 잘 봤어요~
    스멀스멀 뭔가 기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는게 끌리네요.
  • profile
    yarsas 2012.07.17 08:21
    스마트폰으로 댓글을 달았더니 안 달아져서 이제야 답니다. 최근에 컴퓨터를 못했거든요. 저번 화보다 유쾌한 분위기가 조금 줄어들고 음산한 분위기가 좀 감도네요. 다음 화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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