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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긴 익숙했다. 기둥 위의 신성모독적인 이무기 돌부터, 어찌나 관리를 안 하는지 이제는 이끼가 끼기 시작하는 계단과 성벽까지. 물론 전에 한번이라도 와 봤을 리는 당연히 없었다. 흥, 꿈 속이 아닌 이상에야. 하지만 이런 별로 정도 안 가는 영지에서 기시감 나부랭이를 느끼는 바람에 도착해서부터 줄곧 입가가 펄떡펄떡 뛰었다. 마지막으로 이랬던 적은... 글쎄, 최근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이쪽으로 오시지요."


 나는 시종을 따라 복도를 죽 걸어갔다. 벽에 걸려 있는 태피스트리의 그림자와 문양은 어딘가 불편해지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원래는 그 병-이름을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이 잠잠해질 때까지만 여기 대충 붙어있다가 나갈 생각이었지만, 갑자기 영주가 나를 보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불려오게 되었다. 시종에게 이끌려 도착한 곳은 옥좌였는데, 이런 한적한 영지에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화려한 장식 때문에 보기 괴로울 정도였다. 옥좌에는 늙은 영주가, 그의 발치에는 난쟁이 광대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 주위에는 영주 못지 않게 나이들어 보이는 가신들 몇 명이 서 있었다. 거기서 유일하게 오늘 식사가 괜찮았다던가, 입은 옷이 편하다던가 해 보이는 건 역시 광대밖에는 없었다.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히죽히죽거리고 있었는데, 만일 저잣거리에서 만났다면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법한 얼굴이었다. 거의 하루 종일 갑옷을 입고 있었더니 허리가 아팠다. 가뜩이나 불편한 복식인데다가, 성 규모는 코딱지만 하긴 했지만 어쨌건 나는 영주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며칠 씻지 못한 부츠 속의 발이 몹시 가려웠지만 영업상 '잘난 기사님'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나는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어야 했다. 형식적인 자기 소개와 인사가 오가고, 영주가 입술을 뗐다.

 

 "지금까지 수도 없는 사람들이 납치당하거나 목숨을 잃었네. 얼마 전에는 하나밖에 없는 딸까지..." 늙은이가 옥좌에서 내려와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나는 내심 그의 주름투성이 얼굴 어디에 눈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영주만큼이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 가신들이 그를 붙잡고 만류했지만, 늙은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영주는 가신들을 뿌리치고 이제 바닥에 이마까지 대고 있었다. 나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자네의 명성은 익히 들었네. 부디 용을 물리치고 딸을 구해주게..."

 

 또다시 얼굴 한 편이 뻣뻣하게 굳는 느낌이 찾아왔다. 용이라고? 차라리 네가 마음에 안 드는데 여기서 죽어 달라고 이야기하지 그러냐. 다 필요 없으니까 나가자고 그럴까. 아니다. 만일 못하겠다고 나갔다가는 며칠도 안 되어서 구덩이 속에나 들어가 있게 되겠지.  매초 펄떡펄떡 뛰며 뒤틀리는 입가를 감추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돌이킬 수 없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기꺼이 일하도록 하지요. 그럼, 보수는?"

 

***

 얼마 전까지도 기승을 부렸던 그 병의 영향인지 마을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필요한 물건을 구하려면 그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지만, 영주는 약 일 주일여의 시간과 만일 받는다면 당분간 손 까딱도 안 하고 지내도 좋을 만한 보수금을 제시했을 뿐이었다.


 성에서 나서자 이미 시간은 늦어, 어둠이 기어와 산등성이를 갉아내고 있었다. 시간대의 문제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 여기는 지금까지 떠돌아다니며 들렀던 마을 중 가장 분위기가 음산했다. 이런 산골에 있는 왕래 드문 영지가 늘 그렇듯 마을 사람들은 친척들끼리 붙어먹느라 하나같이 눈과 이마가 서로 겨루듯 툭 튀어나오는 등 무서울 정도로 퇴행의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아마 영주의 딸네미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미인이거나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성의 벽에 걸려 있는 초상화에는 제법 그럴싸하게 그려져 있긴 했지만. 어차피 쓰레기 인생, 보수금만 챙겨 뜨는 게 최고였다. 물건 좀 구해달라고 이야기하니 거절한 주제에 영주는 숙식은 성에서 해결해도 좋다고는 했지만, 그 숨 막히는 성에서 먹고 잘 생각은 내 양심만큼도 없었다. 그 차가운 돌바닥에 등을 대고 눕는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말을 끌고 마을로 내려가자 흉측하게 생긴 아이들이 말 뒤를 따라왔다.

 

 “기사님이다! 기사님! 갑옷 한번만 만지게 해 주세요!”

 

 “한 푼만 줘요!”

 

 “괴물 먹이가 또 왔어!”

 

 “버...버...”

 

 “귀찮게스리. 썩 꺼져!” 나는 그렇게 말하며, 전대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아이들에게 던져줬다. 갑옷에 손때를 처덕처덕 묻히고, 말의 꽁지를 잡아당기고-잘도 걷어차이진 않았다-, 말의 주위에 둘러붙어 앞으로 가지도 못하게 하던 녀석들은 차라리 짐승에 가까워 보이는 몸짓으로 그걸 낚아챘다. 말이 놀랐는지 푸르륵거렸다. “이거나 가져가서 뭐나 사먹고 귀찮게 굴지 좀 마.” 그걸 받아든 아이들은 신이 나서 어딘가로 뛰어갔다.

 

 “내 거야, 멍청아!”

 

 “아니거든, 이 짱구야! 어디 더러운 손을 내밀어!”

 

 “헹, 똑같이 안 씻는 주제에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버... 버버버...”

 

 “기사 아저씨, 착한 일 했으니까 괴물 먹이는 아니고 괴물 후식은 될 거에요!”

 

 “허허, 녀석들 참.”

 

 나는 웃으며 달려가는 꼬마들에게 중지를 내밀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몰고 가며 주위를 둘러봤다. 스쳐 지나가는 집마다 오래되었고 다른 곳에서는 구경도 해보지 못한 특이한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맙소사. 그 끔찍한 몰골이라니. 차라리 움막이나 굴이 훨씬 나아보일 것 같았다.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한 것처럼 음습한 기운만이 물씬 풍기는 성당-신부가 전신에 시꺼먼 종기가 퉁퉁 부어올라 관짝에 들어가지 않고서야, 성당에서 그런 분위기가 풍길 리가 없었다-을 지나쳐 낡고 허름한 여관 앞에 다다랐다. 마을에 들어왔을 때부터 떠나지 않는, 기분 나쁜 낯익음만이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말을 맡기고 적지 않은 대금을 주인에게 던져준 뒤, 땀과 소변에 전 갑옷을 집어던지고 짚으로 채워진 침대에 드러누웠다. 빈대와 등을 찌르는 이파리에 불평할 틈도 주지 않고, 잠의 신이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

 

 수많은 어중이떠중이들이 몰려들어 사형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사형대 위의 인물은 몸이 기둥에 단단히 묶여 있었지만, 어두침침한 날씨 덕에 그가 어떤 모습인지도 알 수 없었다. 눈과 코, 입만 뚫려 있는 잿빛 두건을 덮어쓴 형리가 들고 있던 횃불을 장작단에 가져다 댔다. 악취 나는 연기가 올라오는 바람에 옆에서 열심히 중얼거리고 있던 신부는 고름과 피로 얼룩진 리넨 천으로 코를 막았다. 지옥에서 방금 토해져 나온 불길이 기둥에 묶인 것의 모습을 비췄다. 그것은 온몸이 보기 흉하게 낭포와 종기, 그리고 굵은 지렁이 같은 촉수로 뒤덮여 거대한 종기 덩어리처럼 보였다. 몸을 덮고 있는 점액은 장작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말라가고 있었다. 나는 어른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깔려 죽지 않고 이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기 위해 호송마차 위로 올라갔다. 이제 막 자리를 잡고 구경하려 하는 도중, 그것의 뭉개져버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 하나가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내 비명이 광란하는 군중들 사이에서 묻혀버리는 가운데, 그것이 천천히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곧 불에 타 흉하게 오그라들었다.

 

...의 눈이 틀림없었다. 


***


==

안녕하세요, 욀슨입니다. 장송'가'인지, 장송'곡'인지 저도 쓰면서 매번 헷갈리는군요. 매주 토요일 연재 예정입니다만, 다음 주(12/7/7)에는 개인 사정으로 휴재 예정입니다. 내용도 분량도 변변찮은 주제에 시작부터 휴재까지 하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씀 올립니다. 그럼 여러분,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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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윤주[尹主] 2012.06.30 15:55
    기대했던 것 이상이네요 ㅎ 부조리와 냉소가 담긴 글이라고 예상은 했는데, 진지함도 있어서 요새 보기 드문 비애도 느껴집니다. 본격적인 소설로 다뤄도 좋을 만큼 무대나 상황이 잘 배치되어 있네요.
    좋은 작품이 예상됩니다. 한 주 쉬시고, 다음부터 죽 건필하시길 바랄게요^^
  • profile
    yarsas 2012.06.30 16:18
    1인칭 글은 대화하듯 쉽게 읽힌다는 장점이 있죠. 덕분에 읽는데 무척이나 편한 글이었습니다. 게다가 주인공의 성격이 너무 맘에 들고요. 다음 화가 기다려지네요^^
  • profile
    2012.06.30 19:29
    너무 친숙한 소설 이였습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아는 소설을 보는듯 편하게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기사 덕후인 저에겐 정말 좋은 . 앞으로 기대되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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