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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AD] 2. 창공의 불청객 - 1 

 

 

 -……언데드에 대해서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
들이 역사의 표면에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수도 없는 사람들의 희
생과 실험이 진행된 후였고,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끔찍했을 그 실험의
기록들은 당연히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 그들이 역사 속의 한 단편이
되어버린 지금 그들을 조사하기엔 너무나도 자료가 부족한 현실이다. 남
아있는 자료들을 뒤져 알아낸 바에 의하면 언데드의 자질은 육체보다 영
혼에 있다고 한다. 강인한 육체를 가진 이들이 언데드가 된 기록도 분명
많지만 두각(頭角)을 드러냈던 이들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가질 능력도 예측불가여서 언데드란 존재는 어떤 의미에서 매우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렇기에……-

                                                              역사학자 포스먼 하일의 저서 中

 

 

 

 사람의 욕망, 그 시작과 끝은 어디일까?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까지
가져야만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 수많은 철학자와 종교학자들이 신에게
질문을 던졌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질문에 답은 인간이란 존재 자체에
있다. 인간은 그 욕망이란 단어를 통해서 끝도 없이 발전하고 몰락한다.
그것은 종족의 존재이유이자 버릴 수 없는 결점이기도 하다. 언데드 프로
젝트가 시작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 결말이 발전일지 파멸일지에
대한 판단은 좀 더 유보해야겠지만.
 혈(血)의 군주가 다스리는 남쪽의 나라 엘헤미아.
 피는 파괴와 생명, 그 이중성을 모두 상징하는 묘한 단어다. 풍족함을 누
리면서도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엘헤미아는 혈의 의지가 짙게 이어져 내
려왔다고 볼 수 있다.
 겨울여왕이 다스리는 북쪽의 나라 루이즈번.
 겨울은 가혹하고 무자비하지만 그만큼 섬세함이 숨어있다. 눈은 쉽게 바
스라지고 빨리 녹지만 얼음이 되면 놀라운 강도를 자랑한다. 그 땅을 지
키는 전투 집단 발키리(Valkyrie)가 모두 여자인 점은 놀라울 만큼 상징
적이다.
 이 두 나라가 모래시계처럼 생긴 대륙을 위아래로 공평하게 나눠 가진
것이 현재의 모습이었다. 엘헤미아는 따뜻한 기후에 맞게 식량과 물자가
풍부했고 반대로 루이즈번은 석탄과 금속이 많았다. 엘헤미아에 흔하지
않은 귀금속이 루이즈번에는 돌멩이처럼 흔했다. 그들이 서로의 물자를
공평하게 나눠가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세상사 양쪽의 이해가
매번 아름답게 매듭지어질 수는 없는 법. 잠깐의 마찰은 결국 큰 불씨
가 되었고 그 후의 역사는 300년 동안의 대립이었다.
 루이즈번은 엘헤미아인들에게 흔히 마법이 내린 땅이라고 불렸는데 그
이유는 루이즈번이 엘헤미아와는 달리 여성상위(女性上位) 체제이기 때문
이다. 남성성의 극치인 전쟁마저 발키리라 불리는 여성 집단으로 구성될
정도였으니 엘헤미아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신기한 세상이라 할 수 있었다.
루이즈번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어떤 사회체제를 갖추고 있는지는
여전히 밝혀진 바가 적었고 그런 미지라는 매혹이 엘헤미아를 끝도 없이
북진하게 만들었다. 루이즈번에 대해 가장 많이 알려진 건, 당연히 전쟁을
통해 마주하게 된 여전사 군단 발키리였는데, 그들을 상대했던 기사단의
말을 들어보면 그녀들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미녀들이었으나 그 전투력은
도저히 여자의 그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여서 기사단에게 있어선 악
몽과도 같았다고 한다. 그녀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는 300년 동안이나
깨지지 않은 대립이 입증해주고 있다.
 미지와 미녀. 가슴이 설레는 단어이지 않는가? 가지지 못한 것을 원하는
탐욕은 결국 엘헤미아에게 있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다. 그것이 마치 아름다운 여자를 가지지 못해 안달 난 남성이 양심
과 도덕을 버리고 여성을 탐하려 드는 것과 놀라울 만큼 비슷해 보이는 
건 어째서일까.
 언데드 프로젝트의 목적은 간단했다. 혹한을 견디고 강인한 발키리들을
상대하며 멈추지 않고 북진할 수 있는 보다 강한 병사를 만들어 내자.
하지만 그 간단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방법은 통하지 않았
다. 그 때 필요했던 것이 바로 오큐벨라스였다.
 붉은빛을 띄는 보옥(寶玉) 오큐벨라스.
 국보(國寶) 오큐벨라스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고대의 나라 옐마론에서
이어진 유산인데, 엘헤미아의 건국 당시부터 존재했었다고 전해진다. 그것
이 어떻게 엘헤미아로 이어졌는지에 대해선 불분명하지만 전설에 따르면
척박한 땅이었던 엘헤미아에 풍성한 생명력을 심어준 게 오큐벨라스의 마
법 같은 힘이었다고 한다. 오큐벨라스의 붉은 빛깔은 그런 전설이 거짓이
아니라 믿어질 만큼 사람을 홀리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그로 인해 오큐
벨라스는 매해 원년제의 폐막을 기념하는 혈광식 때, 궁성 에펠 앞에 모
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놀라운 빛깔을 발하며 영원히 지지 않을 엘
헤미아의 영광을 기념하게 되었고, 시민들은 그 행사를 무척이나 소중하
게 여겼다. 시민들은 오큐벨라스의 빛이 엘파하를 비추지 않으면 엘헤미
아가 멸망한다고 믿을 정도로 나라의 보옥을 소중하게 여겼지만 윗사람들
에게 있어서는 그저 하나의 상징일 뿐이었다. 헌데 그 보옥이 인간의 피
와 닿으면 묘한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 우연히 밝혀졌고, 세이건은 그
점을 이용해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연구를 명했다.
 그 후, 튜더와 루즈라벤은 인간이 저질러선 안 되는 악마의 기술에 매혹
당했다. 8년에 걸쳐 그들이 터득한 기술은 바로 사람을 재료로 해 힘을
증폭시키는 기술이었다. 그들은 그 기술력을 썩힐 생각이 없었고 1기 언
데드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진행시켰다. 30명을 예상하고 진행시킨 1기 언
데드는 기술력 부족으로 20명만이 생존하고 나머지는 다 죽고 말았다. 물
론 그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생명이 쓰였음은 말할 것도 없
다. 하지만 살아남은 20명의 전투력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 힘에
매료당한 대장군 세이건은 언데드 프로젝트를 국왕과 대귀족들에게 공식
적으로 공개했다. 당연하지만 그 계획은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하나의 언
데드를 만들어내기 위해 희생해야 하는 인간의 수는 대략 10명에서 20명
정도. 20명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200명에서 400명을 죽여야 한다는 계
산이 나오는데 그것은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300년 동안 이
루어지지 못한 북방정벌의 꿈과 언데드가 보여주는 놀라운 전투력, 굴하
지 않는 대장군의 집념이 결국 현 국왕 에펠로스 알을 설득하는데 성공했
고 2기 언데드 프로젝트는 왕명(王命) 하에 공식적으로 추진되어 1기 이
상의 성공을 거두었다(백성들에게는 당연히 비밀이었다). 그렇게 만들어
진 괴물들이 바로 1기와 2기를 합친 50명의 언데드들인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의 희생 끝에 극한의 신체와 놀라운 재생력을 가지게 되었고
개중의 특수개체는 인간을 초월한 놀라운 능력들을 가지게 되었다. 궁성
에펠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로한이 그런 류에 속한다. 그리고 현재 상처
입은 그를 치료하고 있는 린의 능력 역시 그런 특수개체에서만 나타나는
능력이었다.

 

 “로한, 괜찮아?”

 

 린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로한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린의 능력은
염력(念力)이라 규정되어지는 특수한 능력이었는데 생각으로 상대방의 행
동을 제한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 외에도 지금같이 세포
를 활성화 시켜 자생치유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것도 가능했다. 현
월단(弦月團)의 리더인 알자로는 전투능력보다도 보조능력을 더 우선시
했고, 그렇기에 공방이 잘 이루어진 지금의 조직이 있었다.

 

 “끄떡없어. 루즈라벤 녀석을 태워버리지 못한 게 짜증날 뿐이야.”

 

 린은 그런 로한을 보며 빙긋 웃었다. 로한은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으면
서도 단장이 마음 쓰지 않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한의 상처
는 제법 깊었다. 언데드가 되었다고 해서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
었고, 쉽사리 재생되지 않는 상처는 더욱 끔찍한 감각만을 안겨줄 것이
분명했다. 설은이라는 물질은 언데드에게 유일한 약점이었다. 성스러움을
간직한 순수한 빛깔을 띠는 설은은 광물의 일종인데 독으로도 죽일 수 없
는 언데드의 육체에 인간이 당하는 것과 똑같은 상처를 안겨줄 수 있다.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었다. 고통을 주기 위해 일부러 교묘하게 후벼 판
상처들은 로한의 정신을 오락가락하게 할 정도였다.

 

 ‘그 미친 영감, 다시 만나면 죽여 버리겠어!’

 

 알자로는 치료받는 로한을 묵묵히 쳐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계획의 무리수가 있었던 것을 인정한다. 로한.”

 

 “시끄러, 단장. 내가 약했을 뿐이야. 넘버 3이라는 이름이 우습군. 십인
장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말이야.”

 

 매튜가 거친 음색으로 끼어들었다.

 

 “웃기지 마. 3대1이었다면서? 단장이라도 그 상황이었으면 위험했어.
네가 십인장 한 명을 상대 못할 리가 없잖아?”

 

 로한은 쓰게 웃었다. 직접 십인장과 상대해 본 그는 알고 있었다. 십인장
이란 직위가 좀 잘났다고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귀여운 초록머리의
소녀 세이지가 다가왔다.

 

 “로한, 여전히 심장이 빨리 뛰고 있어. 많이 아프겠지만 좀만 참아. 단
장. 현재 추적자는 없어. 역시 단장의 생각대로야. 치료를 계속해도 문제
없겠어.”

 

 “그럼! 단장이 틀릴 리가 있겠어?”

 

 린이 단장을 보며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알자로는 턱을 괴며 스
캇을 바라보았다.

 

 “세이지의 청각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검증되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스캇?”

 

 “없어.”

 

 스캇은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이 짧게 내뱉었다. 그는 과묵한 성격이었고
다수 앞에서 발언을 하는 것을 싫어했다. 단장은 스캇의 대답을 듣고 완
전히 안심했다. 늑대인간 스캇의 야수와도 같은 후각과 전투능력은 약하
지만 극도로 발달한 세이지의 청각이 있는 한 그들을 향한 추적을 따돌리
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린, 치료를 서둘러 줘. 적들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단장, 조금 진도를 늦춰도 괜찮잖아요? 로한의 부상도 있는데.”

 

 수도 습격 때, 두 번째 폭발지역에서 린과 함께 싸웠던 피트가 단장에게
말을 걸었다. 갈색머리에 안경을 쓴 유약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였다. 전사
라기 보다는 학자에 가까운 외모를 갖춘 피트는 그 외모에 맞게 조직의
참모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오늘 우리는 엘헤미아에 씻을 수 없는 흔적을 남겨줬다. 이제껏 조용
히 지내던 우리 도적단이 수면 위로 부상한 셈이지. 우리 손에 쥐고 있
는 게 뭔지를 생각한다면 여유 부릴 틈은 없다.”

 

 알자로는 그들의 조직을 도적단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엘파하에 테러를
일으키면서도 민간인 피해자가 제로에 가까웠던 것은 알자로가 조직이 가
지는 의미를 분명히 했기 때문이었다. 조직명은 현월단(弦月團). 초승달을
좋아하는 알자로가 직접 붙인 이름이다. 조직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모
두 알자로의 능력 덕택이었고 그가 없었다면 비밀리에 이런 일들을 지속
시켜온다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단원들이 단장에게 보내는 신뢰와 존경
은 매우 높은 것이었다.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알자로가 주는 것이
기 때문이다.
 알자로가 조직원을 모을 때 특히 유의한 점은 개인의 실력보다 한데 모
였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었다.
 소수의 언데드로 구성된 도적 집단.
 하지만 그들이 모여서 벌인 업적은 알다시피 수도 엘파하를 전대미문의
테러로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단순히 전투능력만을 최고로 치지 않았기
에 정찰과 탐색에 가장 유용한 청각-세이지를 선택했고 신속한 전개를 위
해 세이지의 청각을 그 즉시 전원에게 전달할 수 있는 텔레파시-엘로린을
선택했다. 엘파하에서의 테러가 서로 떨어져 있었음에도 삐걱임 없이 신
속하게 이루어진 것은 바로 두 사람의 능력 덕택이었던 것이다. 매튜가
십인장 루이나가 다가오기 전 먼저 도망칠 수 있었던 것도, 동문과 서문
을 통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동시에 도주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의 귀와
입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휘는 단장이, 세이지가 듣고 엘로린이 전파한다.
 이 삼박자가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있기에 그들 조직이 압도적인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보조 능력자들의 기량을 가장 잘 알고 있
는 알자로의 수완이었다. 피트는 그런 단장이 내린 명령이기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를 마치는 대로 계속 이동한다.”

 

 

 


 레이넌 가(家)는 백작의 작위를 갖춘 꽤나 잘나가던 귀족가문이었다. 평
범한(?) 귀족들이 그렇듯 물보다 포도주를 더 즐겨 마시는 부를 축적했고
엘파하 내에서 사람들 귀를 간질일 정도의 명성은 가졌었다. 그들의 조상
중 딱히 빼어난 위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
운 것도 아니었지만 레이넌 가는 매우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귀족의 상징
을 갖추고 있었고, 고작 그거 하나만으로도 다른 귀족들보다 조금의 우위
를 누리며 떵떵 거릴 수 있었다. 바로 왕가의 핏줄만이 이어받는다는 금
발의 혈통이 레이넌 가에 짙게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그들은
원래 국왕과 친척 관계가 아니었다. 선대 국왕 중 하나가 씨를 잘못 뿌린
것이 레이넌 가의 후대를 빛나게 해준 것이다. 허나 사람은 오르막길에서
곧장 내리막길로 곤두박질 칠 수 있다는 걸 항상 명심해야 하고, 위에 있
을수록 자신의 발밑을 더욱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태생부터 잘못 뿌린
종자 아니랄까봐 로한의 고조할아버지는 북방정벌 도중 포로로 잡아들인
발키리들의 미색(美色)에 빠졌고 그녀들과 재미를 보는 동안 역습을 당해
그의 관활 하에 있는 1000여명의 병력이 몰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전략적 요충지에 있었던 그의 부대가 전멸하는 바람에 국왕은 눈물을 삼
키며 북방정벌의 꿈을 접고 후퇴해야만 했고 당연히 국왕은 격노했다. 가
진 거라곤 짙은 금발 밖에 없던 레이넌 가의 몰락은 순식간이었다. 그들
은 단번에 변방으로 추방되었고 귀족원들의 회의 하에 30년 동안 수도 땅
을 밟지 못하는 벌을 받았다.
 추운 변방에서 태어난 로한은 어렸을 때만 해도 자신의 삶이 불행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철이 들 무렵 자신이 자신의 아
버지와 하녀가 교배해 만들어진 더러운 잡종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레이
넌 가문이 몰락한 이유도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모든 게 명백해졌다. 아
버지가 왜 자신을 멀리 하는지. 왜 어머니라 알고 있던 사람을 어머니라
부를 수 없었는지. 형제들이 왜 자신을 따돌리는지. 하녀들이 왜 자기만
보면 수군거리는지. 그 때부터 로한은 반항이 심하고 거칠어졌다. 레이넌
가는 귀족답지 못한 품행을 가진 저속한 인물들이 모인 가문이라고 지속
적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형제 중에서 가장 똑똑하고 뛰어난 재
능을 가졌었지만 결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던 로한은 뼛속까지
남아있는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했고 결국 자신의 방을 청소하던 하
녀를 덮치고 말았다. 선대에서부터 내려져 오던 추악한 욕망의 사슬. 그것
은 끔찍한 자기혐오와 자기파괴였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버려진 그의
영혼은 갈가리 찢어지고 나약해졌다. 그는 그 공허함을 풀기 위해 더욱더
여자의 품을 찾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자신이 하녀
를 임신시켰을 때 그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하녀는 죽었다.
 더 이상의 이미지 실추를 막기 위한 아버지의 명령이었는지 하녀의 자살
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로한은 자신이 끔찍이도 싫어한 아버지
랑 똑같은 부류의 사람이 되었고 두 생명을 빼앗았다는 죄책감만이 남았
다. 어쩌면 자신의 진짜 어머니도 이렇게 죽었었는지도. 그 때부터 로한은
더 이상 여자를 찾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것이 정확하다. 그는 공포에
떨며 나날이 약해져 갔다. 그의 형제들은 그를 병신 취급했고 아버지는
살아온 평생 단 한 번도 그를 향해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불행의 종말이 다른 방식으로 찾아왔다. 언데드라는 
이름으로.
 언데드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인간이었고 그 재료는 당연히 구하기 쉽지
않았다. 그로 인해 튜더와 루즈라벤은 거지, 고아, 사형수, 소수민족들을
전국적으로 잡아들였고(국왕의 이름을 빌려 정화 정책이라는 명목으로)
귀족들에게까지 손을 벌렸다. 레이넌 가문은 결국 그들에게 있어 버려도
상관없는 로한을 희생하기로 했다. 사람을 제공해주는 대가로 신분상승을
얻는다면 과연 그 거래는 공정한 거래일까.
 로한은 지옥 같은 고통과 수모, 죽음을 대가로 괴물이 되었다. 새로 얻은
삶이 파괴와 섬멸만이 목적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도 그는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더 나을 거 없이 항상 불행과 같이하는 삶이었으니까.
차라리 분노로 모든 것을 태울 수 있게 된 지금의 모습이 좋았다.
 그 때, 나타난 손길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었다.

 

 ‘세상을 훔쳐보지 않겠나?’

 

 로한은 쓰게 웃었다. 지금 생각해도 재미난 말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목숨 걸고 즐겨보고 싶은 일이 생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같이 함께하고
싶은 동료들이 생겼다. 린은 치료를 끝내고 로한에게 손을 내밀었고 로한
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로한은 자신의 가슴 속에 남
아있는 상처가 아물었는지는 스스로도 잘 알지 못했다. 떠나기 전 태어나
처음으로 들었던 그 말은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진심이었을까…
….

 

 ‘사랑한다, 아들아.’

 

 

 


 튜더는 고민했다. 그들이 동문과 서문을 동시에 열었기 때문에 명확한
도주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한쪽이 속임수일 가능성이 컸기에 그 
결정은 더욱 신중해야 했다. 오큐벨라스는 분명 둘 중의 한 방향일 것이
기 때문이다. 튜더는 적들을 더 잘 알기 위해 루즈라벤이 급히 작성한 보
고서를 참고하기로 했다. 의문의 인물인 흑의의 사내를 제외하면 현재 테
러 조직에서 가장 강한 사내는 로한이었다. 그는 튜더 역시 잘 아는 인물
이었다. 그들은 50명의 언데드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전투력을 측정해
그 등급을 숫자로 매겼다. 서열 10위권은 말 그대로 능력을 인정받은 최
고의 괴물들인 셈이다. 넘버 10 안에 드는 언데드는 나머지 40명을 마음
대로 부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격이 다른 존재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세 번째가 바로 로한이었다.
 로한은 언데드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두각을 나타내었고 넘버 3라
는 놀라운 성과를 얻어내었다. 화염을 다루는 괴물의 등장이 튜더에게 얼
마나 강항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었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튜더는 보고서 앞장을 뒤로 넘겼다. 나머지 녀석들은 기록상으로만 따지
면 크게 별 볼일 없는 녀석들이었다. 넘버 13을 부여받은 늑대인간 스캇,
괴력의 망치를 휘두르는 매튜는 넘버 16이었다. 우수하긴 하나 10위권
안에 들지 못하는 녀석들이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녀석들의 넘버는 더욱
가관이었다. 사라진 녀석들 중에 최말단은 넘버 48 세이지. 전투능력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고 우수한 건 청각뿐이었다. 쓸모없는 녀석까지 한패
로군. 이런 녀석들로 구성된 조직이 5명의 십인장이 지키고 있는 엘파하
에 이 정도 손실을 끼쳤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 강하던 로한
역시 궁성 에펠 내에서 3개의 기사단-90명이 몰아붙이자 수적 열세에 힘
겨워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남긴 흉터가 끔찍할 정도라는 건
리더의 역량이 상당하다는 뜻이었다. 로한의 성격 상 남 밑에 들어간다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이니까. 보고서에서 별 수확을 얻지 못한 튜더는 한숨
을 쉬며 십인장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휴, 어떻게 생각하나? 십인장 제군들.”

 

 수도를 지키는 십인장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평가 받는 인실롭이 퉁명스
럽게 말을 뱉었다.

 

 “이봐, 보좌관. 보통 명령은 위에서 하고 나는 그 것을 충실히 따랐다는
점부터 지적해주고 싶은데.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다는 사실은 굳이 말
하지 않아도 될 테고.”

 

 튜더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자존심이 너무 강한 녀석들이 모여 있으
면 이것도 골치야. 생각할 줄 아는 말의 가치는 같이 옳은 방향으로 가지
못할 때는 차라리 있는 만 못한 법이다. 좋은 조타수가 필요한 시점인데
자신이 그 정도 역량이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튜더는 참을성을 가지고
물었다.

 

 “인실롭. 이제껏 없었던 사태이니 의견을 묻는 거 아닌가?”

 

 “그러게 왜 우리로도 충분한데 쓸데없는 괴물 찌끄레기들을 만들어서
이 사단을 나게 만들었냐 이 말이다. 결국 뒷감당은 우리들이 다 하잖아?”

 

 인실롭은 예전부터 언데드 프로젝트의 반대파였다. 그는 신념이 굳세고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북방정벌에서 뛰어난 두
각을 드러냈던 그가 언데드들을 싫어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어허, 인실롭! 말이 너무 거칩니다!”

 

 루즈라벤이 큰 언성으로 인실롭에게 주의를 주었다. 인실롭은 팔짱을 끼
며 뒤로 물러났다. 굳센 얼굴이 마치 강철과도 같았다.

 

 “명령을 내리시지. 방향만 제시해준다면 내가 다 무찌를 테니.”

 

 가장 나이가 많은 악살라스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인실롭의 말을 받
았다.

 

 “껄껄, 역시 자네는 패기 넘치는 젊은일세. 하지만 짙은 투지는 잠시만
접어두세. 보좌관의 말은 우리의 의견을 참고하고 싶다는 뜻일 테니까.”

 

 인실롭도 최고 연장자인 악살라스의 발언에 더 이상 언성을 높이지는 않
았지만 퉁명스러운 대꾸는 까먹지 않았다.

 

 “쳇, 나도 루이나처럼 바깥에 있을 걸 그랬군.”

 

 십인장 중 유일한 여성인 루이나는 다시 있을지도 모르는 습격을 대비해
수도 바깥을 정찰하고 있었기에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튜더는 악살
라스에게 고갯짓으로 감사함을 표하며, 겨우 안정을 찾은 분위기에 잠시
나마 안도했다. 루즈라벤이 때마침 입을 열었다.

 

 “보좌관님. 이미 비상계엄령을 발령했고 전국적으로 전파되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육로이든 해상이든 그들이 가는 길은 이미
막히기 시작했단 뜻입니다. 하지만 녀석들은 괴물이니 방심할 수는 없는
법.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언데드의 최고 강점은 지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괴물을 추적하는 데는 역시 평범한 인간보다는 그들과 비슷하게 사
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언데드가 적격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언데드가 잠을 자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피곤함 때문에 잠을
자야 하는 인간과는 달리 언데드의 능력(특수능력 및 일상적인 효과를 다
포함)을 유지하는데 최소한의 기본 수면이 필요한 것이다. 그들의 필요
수면 시간은 5시간 정도. 능력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수면시간이 앞당겨진
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 시간을 제외하면 끝도 없이 활동할 수 있기
에 추적은 더욱더 신속하게 시작돼야 했다. 그렇기에 루즈라벤의 말은 일
리가 있는 말이었다. 단순히 추적으로만 따져도 인간보다는 언데드가 따
라잡기 훨씬 쉬울 것이다.

 

 “옳은 판단이야. 그럼 방향은?”

 

 “어차피 육로로는 엘헤미아의 북벽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결코 그
벽을 뚫지 못할 겁니다. 그들은 해상을 통해 도주하려 할 게 분명합니다.”

 

 튜더는 고개를 숙이며 지도를 훑어보았다. 엘헤미아의 북벽. 엘헤미아에
서 그 뜻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개였다. 하나는 엘파하 수도 바로 북쪽에
있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계곡 엘몬데드. 아무리 언데드라 할지라도 그
갈라진 계곡을 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루이즈
번과 엘헤미아의 국경을 지키고 있는 십인장 하이막스. 어떤 의미로든 그
두 가지는 다 넘을 수 없다. 분명 루즈라벤의 말은 일리가 있다.

 

 “그래, 그들이 동쪽이나 서쪽으로 향한 것은 분명 해로를 이용하겠다는
의미일 테지. 엘파하의 북쪽은 결코 넘을 수 없는 엘몬데드가 있으니. 좋
다, 추적병은 언데드로. 해상과 육로는 각각 나머지 십인장들이 해결할 것
이다. 엘파하의 동쪽과 서쪽 전부 언데드를 출동시킨다.”“북진하게.”

 

 튜더는 갑자기 들려온 대장군의 음성에 깜짝 놀랐다. 편한 자세를 취하
고 있던 다른 십인장들도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어느새 문을
열고 방안에 나타난 세이건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튜더는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부, 북진이라 하심은?”

 

 “동쪽과 서쪽으로 병력을 나누지 말고 한데 모아서 북쪽으로 출격하라
는 말일세.”

 

 “어째서입니까? 각하.”

 

 “수도를 쳐들어 온 방식만 봐도 모르겠나. 떡밥을 던져놓고 실제론 다
른 걸 털어갔지 않나.”

 

 튜더는 흠칫했다.

 

 “남쪽으로는 도주해봐야 별 소용이 없으니 그들은 북쪽으로 갈 수 밖에
없다. 그들이 오큐벨라스를 훔쳐간 것이 정확하게 어떤 목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라진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튜더, 자네는 당장의 폐막식 문제
부터 걱정하게. 시민들이 얼마나 큰 동요를 일으킬지 짐작도 안 가는군.
레이몬드와 기사단원들의 죽음, 궁성 에펠의 일부가 전소했다는 사실 전
부 막대한 파장을 일으킬 거야. 튜더, 자네가 전담하게. 그리고 루즈라벤,
악살라스. 자네 둘이 튜더를 대신해 추격에 대한 작전을 짜도록. 인실롭.
자네가 직접 언데드들과 함께 추격하라.”

 

 인실롭은 대장군이 자기 이름을 호명할 때 흠칫 놀랐다가 마지막 명령에
는 팔짱을 풀며 경악했다. 세이건은 담담한 눈빛으로 인실롭을 쳐다보았
고 감히 반항할 수 없었던 인실롭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루즈라벤과
악살라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튜더는 대장군의 말에 경악하고
있었다. 동문과 서문을 열고 그들이 도주했기에 북쪽에 대해선 분명 생각
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각하! 수도 엘파하 북쪽엔 엘헤미아의 북벽 엘몬데드가 있습니다. 아
무리 언데드라고 해도 그 갈라진 벽을 넘을 순 없습니다. 그리고 동문과
서문에서의 거리를 생각해도 그들이 북쪽으로 갔다고는……”

 

 튜더는 입을 다물었다. 세이건의 압박감이 회의실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
다. 모두들 목 뒤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놀랍도록 무거운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들의 귀를 후벼 팠다.

 

 "그래서, 트로고스의 보고가 있었나?"

 

 "예, 예?"

 

 "트로고스의 정찰에 북쪽은 포함하지도 않았겠지. 동쪽과 서쪽에서 수확
이 있었느냔 말일세."

 

 "……없습니다."

 

 “북진하게. 두말하지 않겠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명령이었지만 튜더는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
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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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입니다. 최근에 개도 안 걸리는 감기도 걸리고 이래저래 일이 많
았습니다. 그래도 문학란의 윤주 님 작품은 전부 정주행 완료. 다른 분들
작품도 조금씩 읽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창의적인 세계관과 개성적인 요소들을 볼 수 있다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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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망상은 한계가 없지

?
  • ?
    다시 2012.06.16 13:11
    정석적인 판타지지만 탄탄함으로 승부를 보시려는 듯? 그런데 세계관을 설명하는 부분을 좀 줄이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레이넌 가의 이야기는 설명 말고 실제로 쓰면 좋을 것 같은데...이럼 완전 초 대작이 나오겠지만 ㅋㅋ
  • ?
    츤데레 포인트걸 2012.06.16 13:11
    따, 딱히 다시님이 좋아서 10포인트를 지급하는건 아니야!!
  • profile
    yarsas 2012.06.16 16:41
    탄탄함이라뇨 ㅎ 구멍 숭숭 뚫린 글입니다.. 음, 우선 이번 작품의 컨셉이 속도라서 스토리 상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점은 모조리 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세계관 설명하는 걸 더 줄이다 보면 뒷전개를 이해 못 하실거라 판단이 되서.. 하지만 지적 부분 더 고려해보겠습니다.
  • profile
    윤주[尹主] 2012.06.18 07:36
    정주행이라니...분량이 제법 될 텐데요;;;

    글 잘 봤습니다. 어떤 장면을 서술로 처리하느냐, 묘사로 처리하느냐는 어려운 문제같네요;;
    담백한 글이고 솜씨가 좋으셔서 레이넌 가 이야기나 세계관 소개같은 서술이 전개나 분위기를 해치는 거 같진 않습니다. 다만 종이가 아닌 화면상에서 읽을 때 긴 서술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겠네요.
    로한의 과거 이야기는 꼭 필요한 얘기인지 군살인지 아직 판단이 안 서네요. 연재된 내용만 보면, 굳이 나올 필요 없는 내용같기도 합니다. 다만 야르사스 님 성격이 글에 군살을 남기실 성격은 아니다 싶어서요. 좀 더 이후 내용을 보아야 알 수 있을 거 같네요;
  • profile
    yarsas 2012.06.18 09:55
    네. 분량이 많아서 다 읽는데 오래 걸렸습니다 ㅎ 글솜씨가 날로 좋아지셔서 작품을 거듭할수록 몰입력이 좋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그드라실이 제일 재미있더군요.
    제 성격을 믿어주시다니 ㅎ 끝까지 실망 안 시켜드릴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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