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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AD] 1. 현월(弦月)의 밤 - 3     

 


 십인장 루이나로부터 도망친 매튜는 ‘거대한 늑대’가 휩쓸어놓은 첫
번째 폭발현장에 합류했다. 역시나 기사단과 치안대는 전멸해 있었다.

 

 “캬하! 여기도 아주 한판 제대로 벌렸구만? 나보다 더하네?”

 

 매튜의 말 그대로였다. 자신의 망치가 선사한 파괴가 짓이기는 형태였다
면 거대한 늑대가 제공한 파괴는 무참하다 싶을 만큼 갈가리 찢겨진 살육
의 형태였다. 두 발로 서있는 늑대는 자신이 만든 참극을 고고하게 바라
보고 있었다. 본인이 저지른 참극이란 점만을 제외한다면 그것은 마치 추
모라도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마른 체형에 보랏빛이
도는 머리카락을 포니테일 형태로 묶어 올린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매튜
를 보자마자 흘겨보기 시작했다.

 

 “쳇, 좀 그럴듯한 적이 나타났나 싶었는데 무식해빠진 근육 덩어리가
납셨군.”
 
 “뭐야? 린? 네가 왜 여기 있어? 피트는 어디 놔두고?”

 

 린은 두 번째 폭발현장에서 앞의 둘과 마찬가지로 기사단을 전멸시킨 후
이곳으로 합류해 있었다.

 

 “피트야 당연히 엘로린과 세이지 쪽으로 합류했지. 전투원이 아니잖아.
멍청아.”

 

 “자꾸 말끝마다 멍청하다 할 거야? 그럼 너는 전투원이란 말이지? 네가?”

 

 “어이구, 그럼 댁은 전투원인데도 십인장이 무서워서 도망오셨나아?”

 

 “야! 린! 그건 무서워서가 아니라 단장의 명령 때문이었다고! 나도 싸
워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단 말이야!”

 

 “어련하시겠어. 뇌까지 근육으로 되어 있어서 십인장한테 안 발렸으면
다행이지. 힘만 넘치는 멍청아.”

 

 매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기 시작했다.

 

 “린! 너 한 번만 더 날 멍청이라 부르면 옐카의 이름으로 맹세하건데
가만두지 않겠어!”

 

 “해봐, 해보라고! 내가 너 같은 근육돌이한테 당할 줄 알아?”

 

 신나게 떠들어대는 두 사람을 보던 거대한 늑대가 한숨(?)을 쉬었다. 그
리고 그 늑대의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싶더니 이내 수축하며 인간의 모습
으로 변했다. 이 주변에 살아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경악할만한 일이었다.
동물이 사람이 되는 모습은 신화 속에나 있을 법한 일이 아니던가. 하지
만 그런 초자연적인 일이 오늘 밤 엘파하에서는 버젓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른 체형이지만 탄탄하게 잡힌 근육질 몸을 갖춘 늑대인간 스캇은 고개
를 들어 궁성 에펠을 쳐다보았다. 그의 행동거지에는 오만하지만 무례하
지는 않은 기품이 담겨 있었다.

 

 “세이지, 로한과 단장은 어떻게 되었지?”

 

 스캇은 허공에 질문을 던졌다. 상식적이라면 대답이 돌아올 리 없지만,
그의 귓속이 아닌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러 퍼졌다.

 

 -단장은 너무 깊은 곳에 있어서 소리가 들리지 않아. 로한 쪽은 지금
크게 한 판 벌어졌어. 기사단 세 개 이상이 몰려든 것 같아. 조금 있으면
십인장 둘과도 마주칠 것 같아.

 

 스캇은 미간을 찌푸렸다. 싸우고 있던 매튜와 린도 고개를 돌려 스캇을
쳐다보았다. 그들에게도 이 목소리가 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매튜가 다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스캇. 상황이 안 좋은데? 아무리 로한이라도 십인장 둘과 부딪히
면 위험하잖아.”

 

 “너는 입 좀 닥쳐봐. 지금 로한도 그렇지만 단장은 왜 안 들리는 건데?
스캇! 단장이 어떻게 됐으면 어떡해!”

 

 스캇은 ‘네들이 좀 닥쳐야 생각이라도 하지.’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쨌든 둘보다는 발언권이 높은 위치였던 그가 대답했다.

 

 “단장이 말했다. 궁성 내부는 위험하니까 로한과 자기 둘만으로 해결하
겠다고. 어떠한 상황이 벌어져도 결코 궁성 내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그
편이 자기가 처리하기 편하다고 했어. 여차하면 단장이 로한을 데리고 도
망치면 되. 피트, 맞지 않나?”

 

 -피트도 스캇에 의견에 동의해.

 

 매튜는 성이 안찬다는 듯 다시금 스캇을 보챘다.

 

 “스캇,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더 위험한 건 로한이야. 정말 들어가지 않
아도 괜찮을까?”

 

 스캇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단발이 바람결에 흔들렸지만 차분해 보이는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어차피 각오하고 쳐들어왔던 일 아니었던
가.

 

 “우리 쪽에도 만만치 않은 거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어. 함부로 이동했다
가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단장이 명령을 내릴 때까지
대기한다.”

 

 

 


 로한은 사방에서 덤벼드는 적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궁성 내부에 있
는 기사단들의 실력이 최정예여서만은 아니었다. 100여명도 넘는 적들이
사방에서 공격해온다면 어느 누구라도 정신 차리기 어려울 것이다. 싸우
다 지친 것은 아니었다. 피곤함 따위는 모르는 육체를 가졌으니까. 그렇지
만 로한은 버겁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대일이었다면 결코 어쩌지 못했을
기사들도 다수의 우세를 이용하여 로한의 빈틈에 날카로운 공격을 박아
넣는데 성공했다. 로한의 몸에 찌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로한은 불붙은 칼
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폭발음과 함께 포위하던 기사들이 단체로 나가떨
어졌다. 잠시간의 틈을 이용해 로한은 몸을 굴려 넓은 홀에서 빠져나와 
좁은 복도로 들어갔다. 그리곤 일어서자마자 다가오는 적을 향해 다시 한
번 강력한 불길을 내뿜었다. 포위진에서 완벽하게 빠져나온 로한은 주저
없이 왼쪽 옆구리에 박힌 칼을 뽑아내었다. 붉은 피가 솟구치며 고통이
엄습했고 참을 수 없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기사단은 조금만 더 밀어붙이
면 그를 이길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찼다. 그리고 그 희망이 순식간에 사
그라졌다. 로한의 옆구리에서 피가 멎으며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기이
한 술법에 이제는 재생까지.
 ……진짜 괴물이다. 기사단원들은 목 뒤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엘파하의 기사단은 물러서지 않았다. 엘파하로 향하는 공격이라
면 그 무엇이든 무찌르고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덤빈다. 그것이 그들의
사명. 궁성을 지킨다는 신념으로 뭉친 그들이 다시 무기를 들어올렸다. 로
한에게 있어선 확실히 열세였다.

 

 ‘제길! 단장. 이번 일은 잊지 않겠어. 이 고생을 시키다니.’

 

 실내는 싸움의 열기와 로한이 일으킨 불길이 더해져 후끈했다. 로한이
포위당하지 않게 좁은 복도에 서 있었기에 기사단원과의 대치는 꽤나 오
랫동안 이어졌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기사들 뒤로 다른 조가 열심히
불길을 끄고 있었다. 로한은 지금 같은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엘파하의 명성. 역시 실망을 끼치지 않는군. 좀 짜증나, 너희들.”

 

 실망을 시키지 않을 만큼 짜증이 난다는 말이 과연 칭찬인가, 모욕인가.
기사단원들은 지금까지 치룬 전투에 심각한 회의감을 느꼈다. 로한은 말
한마디로 그들을 그로기 상태로 만들어 놓은 후, 전투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의 칼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칼을 잡고 있지 않
은 그의 왼팔에서도 불길이 솟아올랐다.

 

 “자주 쓰지 않는 거니까 영광으로 생각해라. 태울 가치가 있다는 뜻이
니까.”

 

 엘파하의 기사들은 태울 가치가 있다는 게 과연 영광인지 고민하지는 않
았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로한을 좁은 복도에서 끌어낼 수 있을까만 생
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램과 달리 로한은 흉흉한 기세만을 뿜어
낼 뿐 더 이상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깨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것 같
던 대치가 결국 누군가에 의해 깨어졌다. 갑자기 기사단이 양 옆으로 주
욱 갈라졌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기사단원들은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로
한의 머릿속으로 이명 같은 경고음이 울러 퍼졌다.

 

 -로한! 십인장이야! 당장 피해!

 

 “젠장, 올 게 왔군.”

 

 갈라진 기사들의 길 끝에서 십인장 루즈라벤이 칼을 들고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또 한 명의 십인장 악살라스가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구부정하게 들어오는 모습이 영락없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아이고-, 덥구먼. 저 친구인가 보지?”

 

 이제 막 잠에서 깬 악살라스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며 로한을 쳐다보았
다. 루즈라벤이 이를 갈았다.

 

 “이럴 수가! 정말이군! 불의 꽃! 어떻게 지하실에서 빠져 나온 거지?”

 

 로한은 착잡한 심정으로 그 둘을 바라보기만 할뿐 대답하지 않았다. 악
살라스가 굽은 등을 펴며 지팡이를 비스듬하게 들어올렸다. 그리곤 노기
가 서려 있는 말투로 로한에게 경고했다.

 

 “자네는 이제 늙지 않으니 모를 테지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쉬고 싶을
때가 많아지는 법이네. 고로 늙은이의 휴식을 방해한 대가는 비싸게 치를
것일세!”

 

 로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이지, 빨리 단장한테 전해주겠어? 바람잡이 역을 맡다가 진짜 바람
앞에 등불 신세라고.”

 

 -로한, 빨리 도망쳐! 단장은 너무 깊은 곳에 있어서 들리지가 않아!

 

 “젠장, 진짜 죽게 생겼군.”

 

 로한은 왼팔을 땅에 찍으며 거대한 불 폭풍을 일으켰다. 마음먹고 저지
른다면 성벽도 무너트릴 수 있는 파괴력이었지만, 바닥이 무너져서 자신
마저 균형을 잃을 수도 있기에 최대한 폭발력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불
기둥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복도를 가리자마자 로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복도 끝엔 창문이 있었다. 멀지않았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더라도 이 육체라면 죽지 않을 것이다. 뛰어내릴 결심과 함께 로한
은 속도를 높였다.
 20걸음. 저 불길이 사라질 때까지는 아무리 그들이라도 쫓아오지는 못하
겠지. 설혹 저 불길을 뚫고 쫓아온다해도 이미 거리는 충분히 벌어졌다.
 10걸음. 탈출해서 보란 듯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불꽃을 선사해주지!
로한은 기분이 유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뒤쪽에서 전속력을 다해 쫓아오
는 그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불길을 뚫은 모양이군. 생각보다 더 엄청난
놈들인데? 하지만 결코 따라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5걸음. 탈출을 확신한 로한은 도움닫기를 하며 창문 쪽으로 뛰어올랐다.
오늘 충분히 화끈했군. 바로 그 때 창문 바깥에서 발이 날아왔다.

 발?

 그건 진짜 발이었고 무방비 상태에 있던 로한은 공중에서 그대로 얼굴을
가격당하며 뒤로 쓰러졌다. 대체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
대장군 세이건이 창 밖에서 날아(?) 들어왔다. 로한은 미처 정신을 수습
하기도 전에 신속하게 일어나 뒤에서 이어지는 루즈라벤의 공격을 본능적
으로 피했다. 그리고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세 번째 공격이 이어졌다.

 

 ‘미친 영감! 지팡이 속에 칼이 있잖아!’

 

 악살라스가 휘두른 지팡이에 난도질당한 로한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복부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세 번 이상은 후벼 파인
것 같았다. 악살라스가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과연! 말도 안 되는 맷집이로군! 고깃덩이로 만들어주려 했는데 살아
있잖아?”

 

 로한은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자신의 복부를 쳐다보았다. 상처가 아무는
속도가 눈에 띄게 더뎠다. 재생이 잘 되지 않았다.

 

 ‘제길, 설은(雪銀)이로군.’

 

 적을 알면 백전백승 이랬던가. 어떠한 상처도 재생시킬 수 있는 언데드
조차 설은으로 만들어진 무기 앞에는 취약하다. 언데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적과의 싸움은 힘겨웠다. 고통과 함께 절망이 엄습했다. 자신도
괴물이었지만 앞에 있는 세 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보다 더 끔찍한 괴
물들이었다. 인간이면서 괴물보다 더 세면 그게 사람이야? 괴물이지. 로한
은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역시 대장군이 그토록 추구했던 이유를 알겠어. 언데드는 정말 훌륭한
전쟁도구로군. 지치지도 않고, 다쳐도 순식간에 재생하는 병사라니!”

 

 악살라스는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안 좋군. 우리한테는 그저 괴롭히기 딱 좋은 능력
이야. 죽을 때까지 괴롭혀줄 수 있는.”

 

 로한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영감. 취향이 너무 변태적이잖아. 곱게 늙으면 안 돼?”

 

 “이런이런, 괴물에게 충고를 듣다니. 이 나이에 진귀한 경험하는구먼.
헌데 이를 어쩌지? 이 늙은이가 지금 피곤해서 기분이 몹시 좋지 않다네.
곱게 늙도록 노력해볼 테니 자네는 못나게 죽도록 합세.”

 

 로한은 이를 꽉 깨물며 칼에 불꽃을 일으켰다. 불길이 조금 전만큼 격렬
하지 않았다.

 

 “접근하면 모조리 다 태워버리겠다.”

 

 별 의미 없는 협박이었다. 세이건은 악살라스에게 멈추라는 손짓과 함께
로한에게 장검을 겨누었다.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언데드. 말하라. 어떻게 지하 연구실을 빠져
나왔지? 무슨 목적으로 원년제에 테러를 일으킨 거냐?”

 

 로한은 킥킥 대며 웃었다.

 

 “테러?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우리가 보여주고픈 건 이 정도가 다가
아냐. 대장군 나리.”

 

 루즈라벤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것은 창조자가 피조물한테 느끼는
분노처럼 보였다.

 

 “무엄한 녀석! 목을 쳐버리기 전에 얼른 무릎을 꿇어라. 격리 조치에
들어가겠다. 로한!”

 

 로한은 귀가 썩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침을 퉤 뱉었다.

 

 “에라, 밥맛 떨어지는 루즈라벤이로군. 내가 오늘 너만큼은 죽이고 간
다. 덤벼. 뜨겁게 태워 줄 테니.”

 

 “이 녀석이!”

 

 루즈라벤은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로한에게로 달려들었다. 로한은
불타오르는 칼을 위협적으로 휘둘렀지만 부상으로 인해 충분히 재빠르지
못했다. 공기가 마찰하는 격렬한 소리와 함께 작은 폭발이 일어났지만 루
즈라벤은 그 찰나의 틈을 파고들어 로한의 공격궤도를 슬며시 바꾸었다.
칼의 방향은 곧 폭발의 방향을 의미했고 목적을 잃은 파괴는 어떠한 결과
도 낳지 못했다. 루즈라벤은 상처로 인해 빈틈투성이인 로한의 복부를 걷
어찼다. 로한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고통이 온몸을 강타했다. 로한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온몸을 꿈틀거리며 신음했다. 루즈라벤은 일말의 동
정도 없이 그런 그를 짓밟으며 냉기에 가까운 목소리로 물었다.

 

 “목적을 말해. 로한. 대장군께서 묻고 계신다.”“목적은 네들 전부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이 들려왔다. 로한의 대답이 아니었다. 루즈라
벤은, 아니 그 곳에 있던 전부가 대답이 들려온 쪽을 쳐다보았다. 창백한
하얀 피부를 가진 흑의의 사내가 기척도 없이 그들 뒤쪽에 서 있었다. 그
리고 그 것을 깨닫지도 못할 만큼 끔찍한 선물을 들고 있었다.

 

 “레이몬드!”

 

 흑의의 사내는 왼손에 들고 있던 레이몬드의 목을 앞으로 툭 던졌다. 자
신과 같은 십인장의 목이 그들 앞으로 굴러오자 루즈라벤과 악살라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눈앞에 서 있는 청년은 방금 상대한 로한보다도 어
려보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뭔가 달랐다. 그들의 눈은 젊은 청년을 보고
있었지만 그들의 감각은 분명히 경고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위험하다고.
타오르는 붉은 눈이 대장군을 똑바로 직시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대장군.”

 

 “뭐?”

 

 그들의 경악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가 주머니에서 꺼내든 것은 엘
헤미아의 상징이었다.

 

 “오큐벨라스!!”

 

 “너희들은 이 힘을 빌려 우리 같은 괴물을 만들어냈지. 너희들은 인간
이 탐내선 안 될 것에 손을 댔고 결국 파멸을 잉태했다. 후회하게 될 거
야, 대장군. 네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대장군은 충격으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이 사내는 도대체 누구지? 노
회(老獪)한 악살라스는 그 중에서 상황판단이 가장 빨랐고 번개 같은 속
도로 흑의의 사내에게 돌격했다. 하지만 그의 칼은 허공을 갈랐다. 순식간
에 쓰러져 있는 로한 옆에 나타난 흑의의 사내는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리고 루즈라벤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들이 창가 쪽으로 이
동해 있었다.

 

 ‘말도 안 돼!’

 

 악살라스는 경악했다. 복도 입구에서 나타나 반대편 복도 끝에 있는 로
한을 일으킨다? 루즈라벤 역시 기척을 느끼지도 못한 채 로한을 빼앗겼
다. 움직이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건 둘째 치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
는 일이었다. 녀석의 능력은? 대장군은 장검을 흑의의 사내에게 견주며
매섭게 노려보았다.

 

 “도망치게 놔두지 않겠다.”

 

 “도망? 착각하지 마라. 이번 건 그냥 깜짝 파티야. 말하지 않았던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수도 엘파하에 전대미문의 테러를 일으킨 언데드 군단의 리더 알자로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모습으로 세이건의 야수 같은 눈빛을 받아내었다.

 

 “원년제를 끝으로 현월(弦月)은 그믐달이 되지. 미약한 빛이라도 남아
있었던 오늘을 감사해라. 그 날이 왔을 때 너희들에겐 내일의 그믐달처럼
아무런 빛도 없을 것이다. 명심해둬. 미소를 앗아간 자들의 말로는 비참하
지. 그게 너희들의 미래가 될 것이다.”

 

 십인장 두 명과 대장군이라는 정점의 3인방이 눈 뜨고 보는 상황에서 알
자로는 로한을 부축하며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정말 말 그대로 유령
같이 사라져 버렸다. 초승달이 뜬 원년제가 최고조로 무르익었던 밤, 엘파
하는 수많은 기사들과 십인장 레이몬드, 그리고 엘헤미아의 상징 오큐벨
라스를 잃었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 그들은 탄식했다.

 

 

 


 “단장!”

 

 매튜가 망치를 위로 쳐들며 즐겁게 환호했다. 린은 눈살을 찌푸리며 얼
른 알자로에게 다가왔다.

 

 “단장, 괜찮아? 이런! 로한 상태가 말이 아니네.”

 

 알자로는 로한을 스캇에게 넘겨주며 그들에 반응에 화답했다.

 

 “난 괜찮아. 로한도 부상을 입었지만 괜찮다. 우리는 오늘밤 원하는 바
를 얻었어. 치료는 나중에 하고 이제 계획대로 철수한다.”

 

 매튜와 린은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스캇은 로한을 들쳐 업으며
단장에게 결과보고를 했다.

 

 “단장. 계획대로 피트와 엘로린, 세이지는 서문에 있다.”

 

 -단장! 무사해서 다행이야! 우리는 무사해. 서문을 열면 돼?

 

 단장은 빙긋 웃었다. 궁성 에펠을 압박해 들어가던 엄청난 계획의 주모
자이자 십인장들을 경악하게 했던 괴물이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순
수한 미소였다. 누가 보아도 20살 정도의 어린 청년으로 밖에 보이지 않
는 알자로가 뒤에 있는 단원들에게 손짓했다.

 

 “세이지, 무사했구나. 모두들 잘 움직여 주었다. 이제 서문을 열어. 우리
는 동문을 연다.”

 

 단장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신속하게 동문 쪽으로 이동했다.

 

 

 


 튜더는 쾅 소리가 나도록 책상을 내리쳤다. 루즈라벤은 자신의 명줄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루즈라벤!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 할 텐가?”

 

 세이건은 튜더에게 손짓을 하며 말을 끊었다. 그리곤 엄청난 일들을 겪
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에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잠깐, 문책은 나중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루즈라벤. 수도에서
있었던 일들이 하나둘 보고서로 올라오고 있네. 적들의 외형이나 싸움방
식 모두 기록으로 남았다는 말일세. 이제 내가 말하는 바가 뭔지 알겠나?”

 

 루즈라벤은 찔끔하며 대장군의 말을 받았다.

 

 “예, 금일 밤 차트 기록 9시경까지 이상 없었던 지하 관리실에서 사라
진 언데드는 총 7명입니다.”

 

 튜더는 눈썹을 꿈틀했다.

 

 “보고서 전부를 종합하면 금일 수도에서 나타난 언데드는 8명이다.”

 

 “그게, 저도 잘 모르겠다 이 말입니다.”

 

 “루즈라벤!”

 

 튜더에게 얻어맞을까 봐 루즈라벤은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며 몸을 웅크
렸다. 세이건은 한숨을 쉬며 다시금 손짓해 그 둘을 멈추게 했다.

 

 “튜더! 계속해보게, 루즈라벤.”

 

 “그, 그게……, 나타난 언데드들과 저희들 기록들을 조합해보면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사라진 녀석들의 외형과 비슷합니다. 나머지 녀석들은
정보 부족으로 확실치는 않지만 분명히 그 녀석들도 사라진 언데드일겁니
다.”

 

 “궁성에서 불길을 뿜어내던 녀석은 본 기억이 있는데…….”

 

 “그 자는 로한이라는 자입니다. 몰락한 귀족 출신으로 우수한 인재였습
니다. 넘버 3을 부여받았죠.”

 

 악살라스는 눈썹을 치켜떴다.

 

 “호오, 어쩐지 범상치 않더라니. 언데드 중에서 3번째로 강한 사내였단
말이지? 그럼 그 놈들의 리더로 추정되는 그 흑의의 사내는 넘버 1이나
2이겠군?”

 

 “그렇지 않아요, 악살라스.”

 

 루즈라벤의 대답에 튜더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넘버 1과 2라면 나도 알아. 그 녀석들은 오늘 지하에 얌전히 있
었어.”

 

 세이건은 까칠하게 자란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루즈라벤을 쳐다보았다.

 

 “그래, 루즈라벤. 나도 그 자가 궁금하다. 그 자는 누구인가?”

 

 “그러니까, 그게……. 저희 언데드 군단에 그런 녀석은 없습니다.”

 

 “뭐라고?”

 

 “믿어주십시오! 제 목을 걸어도 좋습니다. 저는 10년 동안 이 프로젝트
를 담당해왔습니다. 제가 만들어낸 녀석들을, 특히 레이몬드를 죽일 수 있
을 정도의 녀석이라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상황실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마치 폭풍이 한차례 지나간 후 찾아온
듯한 고요는 모든 시간개념과 공간개념이 마비된 듯 끔직한 분위기를 자
아냈다. 침묵 끝에 세이건이 입을 열었다.

 

 “기록에도 없단 말인가?”

 

 “예, 금일 수도를 습격한 언데드는 8명. 지하 관리실에서 사라진 언데드
는 7명. 단 한 명. 그 한 명이 기록에 없습니다. 저희들이 관리하고 있는
50명의 언데드 중에 그런 녀석은 없습니다!”

 

 세이건은 쓰게 웃으며 초승달을 바라보았다.

 

 “현월(弦月)이 마법이라도 부린 건가. 정말 유령이나 다름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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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격편 끝. 현월의 밤 챕터 끝났습니다. 도입부이다 보니 이번 챕터는 짧
습니다. 평균적으로 한 챕터당 5화정도 될 것 같습니다.
 챕터 끝냈으니 조금 쉬다가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당분간 문학란 작품들
을 좀 읽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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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망상은 한계가 없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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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주[尹主] 2012.06.06 19:20
    이번 화도 기대를 배신하지 않네요 ㅎ 잘 봤습니다~
    탄탄하게 짜여진 설정이 뒷받침을 잘 해주고 있단 인상입니다. 이런저런 의문을 잔뜩 던진 도입부 덕에, 하나하나 그런 의문들을 풀어나갈 앞으로가 기대가 되네요^^
  • profile
    yarsas 2012.06.06 20:57
    항상 저의 정신없는 글에 제일 먼저 댓글 달아주시는 윤주 님. 감사드립니다.
  • profile
    욀슨 2012.06.06 23:58
    다음 편이 저절로 궁금해지는 전개군요. 잘 봤어요.
  • profile
    yarsas 2012.06.07 02:32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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