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491 추천 수 2 댓글 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UNDEAD] 4. 춘신(春信)의 무장 - 1   

 

 


 -……어느 시대든 역사의 한 면을 장식할 영웅들이 존재하고 그 중에서
도 급(級)이 나뉘는 게 이 세상에 묘한 법칙이다. 두 나라의 개국 이래
무수한 피로 얼룩진 전란의 역사 속에서 빼어난 무용을 자랑했던 무장들
이 많았는데 루이즈번에서는 발키리 부대와 ‘공주’, 엘헤미아에는 기사
단과 그들의 수장인 십인장이 있었다. …(중략)… 영웅의 급을 나눈다는
건 사실상 부질없는 짓이며 그들 하나하나가 모두 뛰어난 인물들이었음에
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급수나 등급을 매기기 좋아하는 이들 사
이에서 언제나 빠지지 않고 입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걸출한 인물들은 분
명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가 바로 엘헤미
아의 북벽이라 불렸던 하이막스다. 역사의 기록을 뒤져보면 칼 세이건이
대장군으로 군림하던 시기는 언데드 병사들을 포함하여 엘헤미아 군사력
의 최대 황금기로 불리며, 그는 그 당시 전무후무한 군사정권 체제를 확
립했다. 하이막스는 그런 시대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그 시
기 이후의 대장군 및 십인장들이 이렇다 할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한 것만
보아도 이 주장은 높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영웅들의 처지가 그러할까.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
면 군신(軍神)이라 불렸을 수도 있는 다른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이)들이
단 한 명으로 인해 훌륭한 무장 정도로 전락한 것이다. 수많은 고대사를
확인해 보아도……-

                                                                   역사학자 포스먼 하일의 저서 中

 

 

 

 궁성 에펠은 국왕이 거주하고 있는 공간인 만큼 뛰어난 건축가들과 조경
사들이 건물의 외형 및 조경에 눈물겨운 노력을 해왔고 거기에다 세월이
더해져 절로 감탄을 자아내는 장소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잘 알
려진 장소가 있다면 역시 궁성 에펠 내에 있는 정원 ‘에펠로스의 빛’일
것이다. 귀족들이나 궁성 내 행정직원들이 업무 외 여가시간에 산책을 즐
기는 곳이며(심지어 그 규모 때문에 가끔 길을 잃는다는 소문마저 도는)
어떤 의미에서는 궁성 에펠보다도 오래 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초대
혈의 군주 에펠로스 루가가 정원으로 사용될 공간이 맘에 들어 지금의 자
리에 궁을 지었다는 야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에펠로스의 빛이라고 칭할 정도라면 초대 군주가 얼
마나 이 정원을 사랑했는지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렇기에
에펠로스의 빛을 찾는 이들은 루가만큼의 찬탄은 아닐지라도 그 못지않게
이 정원을 좋아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루가가 그만큼 사랑했던 이곳을 현
군주 에펠로스 알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어째서? 그 의문의 해답은
역사를 거슬러 8대 혈의 군주 에펠로스 블람에게 물어야 한다. 그 당시
루이즈번과 엘헤미아의 관계는 극에 달해 있었고 몇 번은 국왕암살시도까
지 있었다. 지금처럼 굳건한 엘헤미아의 북벽이 없던 시절이니 가능한 일
일 것이다. 블람은 유명한 산책광이었고 신변의 위협 때문에 정원을 거닐
지 못한다는 것에 염증을 느껴 궁성 에펠 건물 최상층에 소규모 정원을
만들 것을 명령했다. 그것이 ‘에펠로스의 빛’만큼 유명한 ‘하늘정원’
의 탄생 배경이다. 하늘정원은 에펠로스의 빛과 달리 국왕과 그를 모시는
소수의 가신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선택받은 산책로였다. 하지만 아이러
니하게도 암살시도를 겪은 블람은 그 후 건강이 급속도록 나빠져 하늘정
원이 완성되기 전에 명을 다했다. ‘일찍 죽고 싶다면 하늘정원을 지으세
요.’어쩌고 하는 우스갯소리는 여기서 유래됐다. 어쨌든 블람의 노력 덕
에 건축역사에 길이 남을 하늘정원이 완성되었고 후대 군주들은 신하들의
눈치나 암살의 위협 없이 편안하게 산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듯 하
늘정원에는 앞에 열거한 익히 알려진 장점 외에도 지금같이,

 

 “아, 정말 짜증나는군!”

 

 “망극하옵니다.”

 

 국왕이 히스테리를 부리는 모습을 감출 수 있다는 보다 사소한 장점도 
있다.

 

 “짐이 하는 말마다 망극만 외치는 자네들은 좀 빠져 주겠나? 대장군이
랑 담소를 나누는데 몹시 방해가 되는데.”

 

 국왕의 폭언에 가신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라 했고 세이건은 정신
적인 멀미를 느꼈다. 국왕 앞에서 한숨을 쉴 수는 없었던 세이건은 감정
을 숨기며 가신들에게 명령했다.

 

 “잠시만 물러나 있어 주게.”

 

 원칙상으로만 따지면 세이건은 절대명령권자인 국왕 앞에서 그의 가신들
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지만 가신들은 국왕의 말과 대장군의 부탁을 합쳐
서 수용하기로 했다. 가신들이 물러가자 세이건은 다시금 이어질 국왕의
폭언을 각오했다. 예상대로 거침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 지금까지의 상황을 짐이 정리해야만 하나? 대장군?”

 

 “……면목 없습니다.”

 

 “수도 테러에 십인장 사망. 게다가 오큐벨라스 도난까지. 오늘 레이몬드
의 장례식이 치러질 텐데 사태 수습할 생각이 없나 보지? 칼?”

 

 국왕의 입에서 대장군의 직함이 사라졌다.

 

 “칼, 자네가 짐에게 이만큼의 실망을 끼친 적이 없었다는 걸로 지금의
상황을 위로하면 되겠나? 짐은 자네가 원한 십인장 임용과 무생궁 등 수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언데드 프로젝트의 결말이 이런 결말을 낳
았군. 더 말이 필요한가?”

 

 세이건은 머리에서 쥐가 나는 느낌에 세일로 레이텐 한 잔이 절실한 심
정이었다.

 

 “자네가 피동적인 원동력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짐은 익히 알고 있네.
그런데 지금 자네의 일 처리 방식이 뭐가 다르지? 직위가 높아지니 드디
어 쉬고 싶나? 아주 쉬게 해줄까?”

 

 “폐하…….”

 

 지금 국왕이 구사하는 무뢰배의 어투를 극작가들이 들었다면 수많은 희
극과 야사가 만들어졌을 터이지만 당사자인 세이건에겐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책임지고 완수하겠다느니, 망극하다느니 하는 말을 할 텐가?”

 

 세이건은 마른 침을 삼키며 말했다.

 

 “폐하, 송구스럽지만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올려.”

 

 “프라이아 설원을 기억하십니까?”

 

 당장 국왕의 표정이 굳었다.

 

 “……, 지금 그 말을 왜 하는 거야?”

 

 “저는 지금 제 공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제 뜻은……, 그 때 일이 없
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짐도 없었겠지.”

 

 프라이아 설원. 하이막스가 지키고 있는 옵슬레이를 지나 루이즈번을 향
해 계속 올라가다 보면 마주치게 되는 거대한 설원이다. 루이즈번을 집으
로 비유한다면 프라이아 설원은 마당이라 할 수 있는데, 그 곳을 뚫으면
루이즈번의 겨울여왕이 살고 있는 알리아데까지 가는 큰 벽을 허무는 것
이라 할 수 있다. 25년 전 국왕 에펠로스 알은 그 벽을 두드리려다 쓴 고
배를 마셨다. 급작스럽게 악화된 날씨로 인해 한치 앞도 보기 힘들만큼
휘몰아치던 눈바람, 그리고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발키리들의 매서운
공격은 순식간에 병력의 절반을 잃게 했다. 300년이나 지속된 대립 속에
서도 손에 꼽히는 패전이었다. 그 치욕스러운 패전에서 국왕은 사랑하는
자신의 두 아들마저 잃었다.
 그때 역사를 바꾸는 만남이 있었다.
 기사단마저도 어쩌지 못하는 일촉즉발의 위험 속에서 세이건의 초인적인
분투로 인해 퇴로가 열렸고,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부대를 지휘해
두 왕자의 시신과 오큐벨라스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또 하나의 국보 ‘왕
좌의 피’를 되찾아왔다. 일개 자작이었던 세이건이 역사의 전면으로 드
러나는 순간이었다. 국왕을 안전하게 수도까지 대피시킨 세이건은 비록
패전이지만 전쟁영웅이 되었고 즉시 백작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두 왕자의 죽음으로 왕권이 약해질 시기와 맞물려 국왕의 전폭적인 지지
를 받았다. 상위귀족들이 손을 쓰기 전에 세이건을 중심점으로 군사력을
강화시킨 것이다. 세이건은 재능과 시운을 타고난 전형적이면서도 흔하지
않은 영웅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세이건은 왕좌의 피를
통해 언데드의 가능성을 깨달았다.
 왕좌의 피는 오큐벨라스와 더불어 엘헤미아 왕가의 대대로 내려오는 또
하나의 물건이며 오큐벨라스와 같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오큐벨라스의
작은 파편으로 만들어진 왕좌의 피는 목걸이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국왕
이 후계자로 확정지은 왕자에게 내려주는 절대적인 상징성을 자랑하는 물
건이다. 세이건은 비록 왕의 후계자를 살리지는 못했지만 나라의 상징을
잃게 놔두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언데드를 낳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 할지라도 앞으로 쓰이는 역사의 장에서는 다르리라.
 국왕은 지금도 자신이 프라이아 설원에 있는 듯 한기를 느꼈다. 언제 생
각해도 끔찍한 기억이었다. 세이건은 움츠러든 국왕을 바라보며 깊은 울
림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그때의 일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제가 짐작한다고 감히 아뢰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의 일을 분명 운명의 계시라고 생각하며 미
래를 향해 던져진 주사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반드시 폐하께 약속한 내
일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는 에펠로스 왕가, 아직 후사가 없는 혈의 군주
에펠로스 알이 대장군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대장군 역시 차분히
그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대장군은 국왕의 눈에서 타오르는 열망을 읽을
수 있었다. 알이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대장군, 그대는 짐에게 무엇을 보장할 텐가. 짐에게 어떤 내일을 약속
할 것인가.”

 

 다시 대장군의 호칭이 돌아왔다. 대장군은 국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
늘정원처럼 보는 눈이 없는 공간에서 그들은 대체로 골치 아픈 격식은 빼
고 얘기를 나누는 편이었고 그것은 서로가 원하는 바였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대장군이 국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그 의미가 분명하다. 알
은 그가 어떠한 심정인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겸허히 그의 맹세를 기다렸
다.

 

 “폐하께서 세상의 주인이 되시는 겁니다.”

 

 

 


 하늘정원과 더불어 궁성 에펠에서 가장 유명한 정원 ‘에펠로스의 빛’,
전자가 국왕을 비롯한 소수의 인물들에게만 허락된 공간이라면 에펠로스
의 빛은 보다 친근하면서도 개방된 공간이다. 그리고 개방된 공간답게 넓
은 규모를 자랑한다. 그렇기에 궁성 내에 연중행사 중 실외에서 가능한
것이라면 대부분 이곳에서 치러지는 것이 관례였다. 루가가 붙여준 이름
처럼 에펠을 빛나게 해주는 장소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 드리워진 빛은
평소와 다르게 다소 어둡고 우울해 보였다. 정원 내 중앙광장의 중심에는
위엄 있는 루가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고 그것을 축으로 검은색 정복을 차
려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귀족이었고 수도 내
십인장들도 모여 있었다. 인파의 좌측에 위치하고 있던 궁정악단이 장엄
한 선율의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연주는 선
율 자체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었고 그로 인해 정원에 있는 나무들마저
공감하는 것 같았다. 바람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감정을 공
유하며 같이 아파하는 것처럼. 슬프고도 웅장한, 무겁게 깔려서 질식할 것
만 같은 그런 엄숙함이 있었다. 그 중심에서 제 14대 혈의 군주 에펠로스
알이 평상시에 걸치는 화려한 예복이 아닌 귀족들과 같은 검은색 정복을
입은 채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 옆에는 국왕을 지키는 소수의 호위무사
들이 있었고 그 무리 앞에는 대장군 세이건이 평소와는 다르게 깔끔하고
절도 있는 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세이건보다 더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서있던 보좌관 튜더가 선율에 박자를 맞추듯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에 항상 자리 잡고 있는 엄격함이 오늘따라 더욱
딱딱해 보였다. 그 엄숙함에 청중들의 숨소리마저 잦아들었다. 이윽고 연
주도 멎었다. 끝남과 거의 동시에 튜더가 귀족들을 향해 목청을 높여 말
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위대하고 자비로우시며 지극히 높으신, 미욱한 저희들을 보
살피며 영원히 지지 않을 영광을 빛나게 하시는 제 14대 혈의 군주 에펠
로스 알 폐하를 모시며 국가를 수호하는 엘헤미아의 갑주이자 수도 엘파
하를 수호하는 수도의 방패 십인장 레이몬드 경과 그와 같이 엘헤미아와
수도의 안전을 위해 힘쓰는 엘파하의 기사단장 및 기사단원 108명, 수도
치안대장 및 치안대원 32명의 장례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사망자에 십인장이 포함된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의 직
위와 그의 신분, 그의 업적 때문이 아닌 같은 인간으로써 십인장 레이몬
드의 삶을 재조명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그는……” 도합 141명의 장례
식이지만 실상은 레이몬드의 장례식이다. 사람은 살아서도 격이 나뉘며
이렇듯 죽어서도 격이 나뉜다. 그들의 가족을 제외한 이들은 레이몬드 외
의 죽음을 기억해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어쩌면 그들의 감투만을 기
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남는다. 오늘이 지나면 퇴색되어져 갈 기억이라 할지라도.
 사망자 141명. 블람이 적의 침입 때문에 하늘정원을 지은 이래, 수도 역
사 상 이토록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었다. 역대 최고의 십인장들이 지
키는 수도에서 역사에 깊이 각인될 전대미문의 피해. 그 거대한 손실이
오늘 이 자리에서 보다 선명하게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6개의 기사단이
전멸하거나 격파 당했으며 그들의 장(長) 레이몬드가 죽었다. 정원에 모
인 귀족들 인파 뒤로는 갑옷을 입은 레이몬드의 기사단들이 주욱 도열해
있었는데 그들 모두 검은색 완장(腕章)을 찬 채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었
다. 이 피해가 엘헤미아 내 다른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그들 모두
씁쓸하기야 하겠지만 사태를 받아들이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
만 작금의 사태는 엘헤미아 내에서도 최남부에 속하며 그 의미와 상징성
이 고금을 통틀어서도 손에 꼽히는 수도 엘파하에서 일어난 일이다. 게다
가 그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지금의 사망
자는 모두 수도 병력에 속한다. 적들이 마음먹고 수도에서 난동을 부렸다
면 민간인 사상자들이 훨씬 더 많았을 지도 모른다. 수도를 지키는 기사
단원으로서 이보다 더 치욕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단 8명의 인원
으로 수도에 전쟁 급의 피해를 입혔다. 그뿐인가. 소수만이 알고 있는 사
실, 국보 오큐벨라스마저 빼앗겼다. 그들의 목적은 전쟁이 아닌 절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절도를 전쟁을 넘은 국가적 사태로 급상시켰다. 만
약 그들이 루이즈번에서 언데드를 생산하는데 성공한다면. 질식할 것 같
은 압박감이었지만 세이건은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흐트러지지 않았다. 보
좌관은 그 후로도 무척이나 간단명료한 사실을 무척이나 많은 미사어구를
갖다 붙여 ‘사람 많이 죽은 장례식’을 ‘국가적 손실이 가득한 장엄한
장례식’으로 멋지게 포장시켰다.

 

 ‘아름답지 못해.’

 

 눈부신 태양도 그들 얼굴에 진 그늘을 거두지 못할 때, 그 자체만으로 
빛이 나는 듯 착각을 일으키는 십인장 루이나가 레이몬드의 관을 쳐다보
고 있었다. 십인장이라는 같은 직위를 가졌던 이의 죽음, 그녀는 그를 너
무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십인장이 되었을 시기에 레이몬드는 이미 십
인장 직을 맡고 있었다. 루이나에게 있어 남성들의 추파는 흔하다 못해
식상할 정도였는데 그 점은 레이몬드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십인장
중 ‘반’ 다음으로 어린 루이나는 말 그대로 화사하게 피어 무르익은 향
기를 뿜어내는 꽃이었고 그것은 아름다움을 넘어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
는 것이었다. 독신이었던 레이몬드는 그녀에게 숨김없는 애정을 과시했지
만 루이나는 자신보다 약한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고 그렇기에
그의 동기인 인실롭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알다시피 인실롭은 수도
최강으로 평가받는 뛰어난 무장이다. 세이건이 참전했었던 북방정벌에서
두각을 드러내 결국엔 십인장이 된 그를 레이몬드는 어떻게 할 수 없었
다. 그조차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남자였던 것이다.
 남녀관계라는 것은 왜 이리 순탄하기 어려운 건지.
 레이몬드와 루이나 중 누가 더 불행하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인실
롭은 그녀에게 단 한 번도 동료 이상의 선을 넘지 않았다. 루이나로서는
평생 겪어본 적이 없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녀가 진지하게 그가 성
(性)적으로 장애가 있나 의심까지 해보았을 정도니 인실롭의 처신은 놀랍
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그 세 명의 관계 속 어디에도 온전한 짝은 없
었다. 그리고 여느 삼각관계가 그렇듯 인실롭과 레이몬드의 사이에는 묘
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레이몬드가 변했다. 그는
애초부터 인실롭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자신에게 비참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동료 이상의 감정을 보이지 않자 결국 강
렬한 자기부정에 빠지고 말았다. 인실롭은 언제나 그에게 같은 우정을 보
내왔지만 받아들이는 이의 그릇이 그것을 수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루
이나는 여성만이 느낄 수 있는 예민함으로 그 둘 사이에 서 있었다. 그리
고 그렇기에 루이나는 그가 맞이한 죽음의 사유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레이몬드. 그대의 죽음은 아름답지 못해. 그대는 항상 어리석군. 그대
가 지하에서 단장과 싸웠을 때, 기사단을 대동하지 않은 이유를 나는 너
무나 잘 알고 있어. 그대는 증명해보이고, 과시해보이고 싶었던 거야. 자
기긍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래서 지금은 만족해? 그대가 그토록
필요했던 자기긍정이 이런 관 속에 누인 죽음이었나? 난 그래서 오히려
그대의 죽음에 동료 이상의 안타까움을 느낄 수가 없어.’

 

 루이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떨어지는 눈물을 감
추기 위해. 그녀는 진짜 자기긍정이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
었다. 그래서 자기가 이토록 슬프다는 것도.

 

 ‘그릇된 욕망에서 비롯된 자기긍정은 파멸과 다르지 않음을. 미안해. 레
이몬드. 역시 난 이성으로서 그대의 죽음이 슬프지 않아. 내가 지금 슬픈
건 내 처지가 그대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야.’

 

 

 


 펠튼 항구를 지나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면 마주치게 되는 자스퍼 항구.
그 위로 율리아 항구를 지나치면 당장에 루이즈번의 해협에 가까워진다.
인실롭 일행이 자스퍼 항구에서 그들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을 다르게
요약하면 앞으로 그들을 잡을 기회가 단 한 번 밖에 남지 않았다는 의미
이다. 트로고스를 통해 자스퍼 항구에 포격준비를 시켜놓았음에도 불구하
고 크레센트 호는 그들의 노력을 비웃듯 쾌속으로 자스퍼 항구를 지나쳤
다. 두 나라 간의 지리적인 특성상 해상전을 하기 힘들다는 이유 때문에
군함 및 대포의 수준은 전쟁이 아닌 전투의 그 것이었고, 그 정도 화력으
로는 장거리에서 크레센트 호를 격침시키기 힘들었다. 게다가 무턱대고
격침시켰다가는 오큐벨라스를 잃을 가능성도 있었다. 다급해진 인실롭은
몇 번이나 물었던 질문을 다시 꺼낼 수밖에 없었다.

 

 “클라보! 정말 안 되는 건가?”

 

 클라보가 소매로 입을 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몇 번을 말하는지 모르겠군요. 오큐벨라스는 바다의 성질이 드러나는
물건에 약해요. 저희들한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유일한 물질인 설은이
바다에서 채취되는 것도 거기에 이유가 있죠. 오큐벨라스로 만들어진 저
희의 핵은 마찬가지로 바다에 약해요. 저는 바다 속에서 제 능력을 유지
할 수가 없어요.”

 

 인실롭이 처음에 구상했던 계획은 이렇다. 리더스카이에 발락을 태워 공
중을 장악하고 클라보를 바다에 입수시켜 크레센트 호를 따라잡아 단숨에
격파한다. 그런데 오큐벨라스를 통해 만들어진 언데드는 바다 위에서 능
력효율이 반감된다는 미처 예상 못했던 특성이 있는 것이다. 바다에 가까
워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며 직접적으로 바다에 들어가게 되면 아예 인
간과 같은 수준이 된다. 인실롭은 당장에 계획을 폐지할 수밖에 없었다.
인실롭이 끙끙 앓고 있을 때 생각에 잠겨 있던 루더가 클라보에게 질문했
다.

 

 “그럼 현월단도 마찬가지라 보면 되겠소?”

 

 인실롭이 뜨악한 표정으로 루더를 쳐다보았다. 분노에 사로잡혀 있어 깨
닫지 못했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클라보는 더 이상 그렇게 느낄 수 없
을 만큼 당연하다는 태도로 말했다.

 

 “당연하죠. 그들도 언데드인데. 물론 능력이 약해지는 거지 전혀 못 쓰
는 건 아니니까 공중전으로 공략하는 건 여전히 패스에요.”

 

 이것이 트로고스를 이용한 공격이나 발락을 보내는 계획도 폐지시켜야
했던 이유다. 발락을 혼자 보내면 그때 상황이 재현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고 트로고스를 탑승한 병사들은 언데드를 이길 수 없다. 그들이 선택
한 해상 도주는 여러모로 최상의 수였다. 두 십인장이 머리에 쥐가 나고
있을 때 묵묵히 있던 몬반이 입을 열었다.

 

 “기상을 통제하는 건 어떨까?”

 

 “뭐?”

 

 몬반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뜸을 들이다 이윽고 막힘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리더스카이를 이용해 발락을 율리아 항구로 보낸다. 클라보는 여기서
하선해 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 거야. 바다의 힘이 약해지는 민물이라
면 상관없겠지. 그리고 그 둘이 위에서 접선하면 둘이서 힙을 합쳐 기상
이변을 일으키는 거야. 약해졌다 해도 두 명이라면 소규모 태풍 정도는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어차피 지치지도 않으니까 시간 투자만 하
면 태풍 규모도 확장 가능할 것이고.”

 

 몬반이 병력을 이끌어 엘헤미아의 북벽을 부수자고 얘기해도 인실롭과
루더가 이만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몬반의 말은 이제껏 그들이 경험
해 온 일반적인 용병술이 아니었다. 그가 말한 초자연적인 힘을 다룬 싸
움은 일반적인 상식을 몇 배나 뛰어넘는 종류의 것이었다. 충격으로 물들
은 그들의 표정을 보던 몬반이 씨익 웃었다.

 

 “결정된 것 같군.”

 

 몬반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렇게나 단합이 되지 않던 언데드 일행이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락이 리더스카이에게 다가가자 그는 군말
없이 조류로 변신했다. 발락은 몬반을 향해 쾌활하게 말했다.

 

 “짜식! 대단한데? 맘에 들어! 화끈해!”

 

 클라보도 자연스럽게 보트 쪽으로 걸어갔다.

 

 “시작하죠.”

 

 상황통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인실롭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그가 어
떤 성격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인실롭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는 듯 씨익 웃었다.

 

 “좋다. 그대들. 율리아 항구에서 보지. 너무 규모를 크게 키워 우리까지
전복시키진 말도록.”

 

 인실롭의 말이 끝나자마자 창공의 불청객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작열
하는 태양 위로 더 큰 반항을 위해.

 

 “지상 최대 규모의 추격전이로군요. 이번에는 반드시 잡아야만 해요. 인
실롭 씨. 먼저 가겠습니다.”

 

 클라보가 보트를 타고 하선했다. 적당한 곳을 찾으면 알아서 보트를 버
리고 올라갈 테지. 인실롭은 북방정벌 이후 오랜만에 피가 끓는 기분이었
다. 그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전장이 눈을 뜨고 있었다.

 


==================================================================
 춘혈의 무장 챕터 시작했습니다. 학업 문제로 연재분량 맞추기가 빠듯하
군요.

 

 저는 먼치킨 류의 주인공을 다룬 작품을 굉장히 싫어하는 편이라서 제
글에서 손가락 하나로 산을 부수고 말 한 마디로 ‘꿇어라’하면 꿇리는
식에 말도 안 되는 캐릭터가 나올 가능성은 거의 전무합니다. 판타지라는
개념 자체가 현실과는 거리가 먼 얘기이지만 그렇다 해도 현실에 기반을
두는 게 좋으니까요. 요즘 영화라던가 만화에서 지구 하나쯤 부수는 건
일도 아니니……. 지치지도 않고 재생도 되고 초자연적인 능력을 다루는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엄청나지 않나요?

 

 그런 의미에서 몇 번이나 언급되고 있는 십인장 하이막스는 제 소설 속
세계관에서는 충분히 먼치킨 적인 인물입니다. 언젠간 나올 테니 기대해
주시길.

Who's yarsas

profile

 인간의 망상은 한계가 없지

?
  • profile
    욀슨 2012.09.09 09:26
    태풍이라니, 스케일 자체가 틀리군요. 언제나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제목의 '춘혈'이 왕가를 의미하는 건지, 아니면 루이나를 의미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전개 따라서 알 수 있으려나요.
  • profile
    yarsas 2012.09.09 21:57
    창공의 불청객처럼 전개를 따라가면 챕터 제목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챕터 제목을 바꿀까 생각중입니다. 춘혈과 춘신 둘 중 뭘 고를지 고민 중인데.. 아마 춘신 쪽으로 고칠 듯..
  • profile
    yarsas 2012.09.11 01:48
    챕터 제목 춘신의 무장으로 수정합니다.
  • ?
    버물리 2012.10.02 12:13
    문학작품에 지도를 삽입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화형태로 정보를 그리면서 읽어도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는 힘듭니다.

    좀 의문이 드는게,
    역사책의 내용을 소개하다가 현 군주 에필로스 알이 궁성에펠의 에필로스의 빛에서
    과거 8대 군주 에필로스 블랑의 이야기로 시작을 하는것 같은데요.

    내용을 읽어보면 몬반이 기상통제를 제안했을때,
    인실론은 엘헤미야 북벽의 존재에 대해서 모르고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분명히 도입부에서, 엘헤미야의 굳건한 북벽이 없었으니 가능한 일이다.라고
    엘헤미야의 루이즈번의 갈등이 고조될 수 밖에 업는 내용 설정의 원인을
    그렇게 잡으셨으닌까요.

    다수의 인물들이 출연하고, 간단한 지도 이미지가 없어서 대략 위치로 판단되어서 읽기 힘든 점이
    없잖아 있습니다.
  • profile
    yarsas 2012.10.03 00:18
    일단 이렇게 열심히 읽어주신다는 것에 진짜 감동먹었습니다 뉴누.. 저는 저같은 잡문에 이 정도 열정을 가져가며 읽어주실 분이 계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우선 정리하겠습니다. 엘헤미아의 북벽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역이고 하나는 사람이죠. 지역은 수도 엘파하 바로 위에 있는 엘몬데드이고 사람은 십인장 하이막스입니다.
    블람이 하늘정원을 건축한 이유는 암살의 위협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하이막스가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절이었죠. 굳건한 방어벽이 없었기 때문에 수도까지 적군이 내려올 수 있었던 겁니다.
    고로 인실롭이 하이막스를 알고 있는 건 당연합니다. 같은 십인장이니까요.

    루이즈번과 엘헤미아는 300년간 대립을 해왔고 양국의 관계가 좋았던 적은 없습니다.


    지도는 제가 나중에 그려서 올려드리겠습니다.
  • ?
    버물리 2012.10.02 12:18
    독해능력이 떨어져서 인물정보를 모으면서 읽고 읽습니다.
    누가 어떤 인물인지 읽으면 자연스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것에 반해,
    한꺼번에 다수의 인물이 등장하고, 위치도 불명확하고 좀 시간도 많이 걸려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는다는 보다는 전체적인 흐름을 위해서는
    인물에게 많은 관심과 애착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 profile
    yarsas 2012.10.03 00:26
    마지막 문장이 저를 겨냥한 것인지 버물리 님 본인의 얘기인지 조금 애매하군요.

    언데드는 몹시 매니아적인 작품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는 읽을 수 없을만큼 등장인물도 많고 사건전개도 빠르죠. 한 부분이라도 빼먹으면 다음 내용이 이해가 안 갈 정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되도록 사건을 명확하고 간단하게 할 말만 하며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등장인물을 기억하는데 많은 노력을 해야하는 독자들에게 그 이상의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을 적어가면서 읽어주신다는 노력에 저는 정말 감동했습니다. 저같은 무명글쟁이 작품에 이 정도 신경을 써주실지 몰랐거든요. 저만의 리그 같은 글이 버물리 님 덕에 참 의미있었다랄까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등록된 글이 없습니다.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약관] | [제휴문의] | [후원창구] | [인디사이드연혁]

Copyright © 1999 - 2016 INdiSide.com/(주)씨엘쓰리디 All Rights Reserved.
인디사이드 운영자 : 천무(이지선) | kernys(김원배) | 사신지(김병국)